AB지구의 중간지점에는 서산시의 부석면에 소속된 간월도라는 연육된 섬이 있다.

원래 이 섬은 안면도에 속했던 섬이었지만 1973년에 부석면으로 이속된 섬이다. 그런데 이 섬의 원통대에는 간월암이라는 암자가 하나 있다. 그런데 이 절은 옛날에 무학대사가 달을 보고 간월도라는 이름을 붙였음과 아울러 원통대에 간월암을 창건하였다고 전하여지고 있으나 중간에 폐사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후 일제시대인 1941년에 만공스님이 박동래 암면면장의 도움을 받아서 다시 창건했다는 것이〈지명총람〉상에 기록된 내용인데 사실은 만공스님께서 간월암을 창건하려고 박동래 면장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그곳에 산소가 있어서 정낙훈 서산 군수를 찾아가 도와달라고 부탁을 한 것이 장낙훈 군수가 박동래 면장에게 지시하여 산소를 이장하게 됨으로써 간월암을 다시 창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정기관의 도움을 받은 것은 묘지를 이장하여 준 것 뿐인데 수덕사의 주지 스님이셨던 만공스님께서 그토록 간월암 창건에 힘을 기울였던 이유는 아무도 모르는 간월암에서 제자들에게 독립을 기원하는 기도를 드리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원래 만공스님(1871~1946)은 전라북도 정읍 출생으로 속명이 도암이며 법명은 월면으로 여산 송씨로 알려져 있다.

수덕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조선총독부의 불교정책에 정면으로 반대하였던 독립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스님이지만 간월암을 재건하여 제자들을 시켜 독립기도를 드리도록 시켰다는 사실은 필자로서도 처음 듣는 이야기다.

이와 같은 만공스님과 간월암에 대하여 서산의 이은우 선생께서는  서산의 문화 25집에 투고를 하셨는데 그의 내용에는 이은우 선생이 1973년에 간월암을 방문했을 때 그곳에는 ‘석호목조상생전 만공서’라 쓴 족자가 걸려있었다 한다. 그런데 이 족자는 만공스님께서 주지 스님을 시켜서 정낙훈 군수에게 고마운 뜻으로 전해주라 하였는데 스님이 서산군청에 들렀을 때 정낙훈 군수는 이미 보령 군수로 전근한 이후였으므로 전달하지 못했는데 만공스님께서 보령군청에 가서라도 전하라고 다시 명하셔서 보령군청엘 들렀더니 그때는 이미 공직을 떠난 이후여서 정낙훈 군수에게 전달하지 못해서 이곳에 이렇게 걸려있다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저 글의 뜻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큰스님께서 쓰신 글을 우리 같은 범인이 감히 촌탁(남의 마음을 미루어 헤아림)할 수가 있겠느냐고 말했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필자는 그와 같은 족자를 확인하여 보려고 간월암을 찾아가 보았다. 그러나 오늘날의 간월암에는 그와 같은 족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간월암 측의 답변으로는 수덕사의 박물관으로 옮겨갔을 것이라는 설명뿐이었다. 그렇다면 그 족자에 쓰여 진 ‘석호목조상쟁전’이란 무슨 뜻일까? 돌, 호랑이와 나무, 새의 서로 다툼이 시작 되었다는 뜻이라면 일제와의 전면전을 경고한 이야기로 보아야 할까? 독자 여러분들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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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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