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하 전북대 인문대 명예교수
이규하 전북대 인문대 명예교수

얼마 전에 일어난 야당 대표에 대한 테러행위를 보고 우리 국민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이미 이 사건이 터지기 전에 나는 계속되는 여·야의 극한적 대립을 보면서 종편(綜編)들의 시사평론 시청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여·야 정치인들이 격렬히 대립하고, 이어서 당 대변인들과 당에 속한 정치 평론가들이 TV 방송에 출연하여 현란한 언변으로 상대방을 비방·공격하며, 논쟁에서 몰리면 과거의 잘못까지 들추어내어 시청자들을 분노케 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글로벌 시대인 만큼 극단적 대립이 대 재앙으로 이어진 세계사적 사건들의 예를 들고자 한다. 첫째로, 우리에게 신곡(神曲)의 저자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의 유명한 시인 단테(Dante Alighieri)는 피렌체의 정치에 적극 참여하여, 피렌체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서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가(전체 900여 년 가운데 약 600년 동안 통치한) ‘신성로마제국’에 예속되어야 한다는 제정론(帝政論)을 내세우면서 교황 중심의 정치사상을 편 교황파와 극단적으로 대립했는데, 후자가 집권하자 사형선고를 받았고 평생 동안 모국 입국을 금지시켰다.

다음으로는, 아돌프 히틀러(A. Hitler)와 그의 모국 정부 간의 극한적 대립에 관해서이다. 히틀러는 한동안 비엔나에서 룸펜생활을 하다가 독일로 들어가 나치즘을 중심으로 정권을 쟁취한 후 모국정부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요구조건을 내세웠고, 오스트리아 정부는 강력한 저항의 표시로 ‘국민투표 실시’를 결의 했다. 이에 몹시 화가 난 히틀러의 지령에 따라 오스트리아 내 나치 당원들이 정부청사에 진입하여 대통령·수상·장관들을 살해코자 했으나 수상을 살해하는 것으로 끝이 났고, 수천 명의 나치스 당원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다. 하지만 곧이어 대통령이 사임했고, 실권을 장악한 나치스가 독일과의 합병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어느 정도는 합법적으로 통합이 이루어졌다.

그 다음으로는, 히틀러와 체코 정부와의 극단적 대립관계에 대해서이다. 처음부터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의 패배와 이어진 베르사유 평화 조약의 산물인 체코를 파괴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슬로바키아를 체코로부터 분리시켰고, 이어서 헝가리·폴란드에 접경지역을 할양토록 했으며, 이어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보듯이 독일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을 독일에 합병시키고자 했다. 때문에 독일과 체코는 극한적으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고 서방국가들의 유화정책으로 인해 체코는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지면 관계상 길고 복잡한 내용을 간략히 줄이면, 독일군이 체코 국경 지역에로 진입하자 체코정부는 ‘군사동원령’ 내렸으며, 이것을 큰 모욕으로 생각한 히틀러는 체코 대통령 하하(Hacha)를 베를린으로 초치하여 프라하 폭격의 위협 하에 잔여 체코를 독일에 넘겨주는 문서에 서명토록 했다. 이로 인해 체코라는 나라는 일시 지구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들은 히틀러의 ‘대 게르만국가 건설’이란 목표 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끝으로, 베르사유조약을 통해 독일 영토를 가장 많이 취득한 나라가 폴란드였는데, 독일이 칸트의 탄생지이기도 한 ‘단치히와’의 ‘치외법권적 도로 연결’을 요구했을 때 폴란드 정부가 강력히 반대했고, 또한 영국이 독일의 대륙 패권 장악을 두려워한 나머지 히틀러의 요구를 거부하자 히틀러가 단치히를 공격함으로써 마침내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결론적으로 우리의 여·야 관계도 이 대표 사건을 계기로 극한적 대립을 피하고 보다 유연하고 융통성 있는 정치로 바뀌어 나아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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