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레비나스에게 생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하고 물었다. 레비나스는 “이별이나 아픔,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간의 단조로움, 이처럼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상처나 망설임에서 시작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레비나스는 삶의 테제를 붙잡고 고민한 학자다. 그가 얻은 결론은 세상 어디에도 진정한 삶이 없다는 것이다. 진정한 삶이 없기에 진정한 삶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나에게 언제 생각을 시작했는지 물어본다. 유년 시절 신정동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 땅바닥에 그림을 그리며 생각을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런 때에는 아이들과 놀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살아있음을 물을 때마다 나는 강물 속 비늘을 거꾸로 세운 물고기처럼 헤엄친다. 

세상에 실현해야 할 무엇을 손에 쥐고 있던 궁예는 두 아들을 죽이고, 불에 달군 쇠몽둥이로 아내의 음부를 불태워 죽였다. 
그는 사람 마음을 읽는 재주를 이용하여 숱한 사람을 죽였으나, 신임하는 왕건이 반란에 참여했다는 말을 듣고 진압을 포기한 채 산으로 도망쳤다. 도망길에 배고픔을 어쩌지 못하고 날보리 이삭을 훔쳐 먹다 붙잡혀 처형된 그에게 세상은 어떤 의미, 어떤 그림이었을까?
나는 세상이 어떻게 설계되었는지 모른다. 그 도면을 본 적이 없다. 영혼을 내놓고서라도 보고 싶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그나마 인간이라도 이해하고 싶어, 이러저러한 조건에서 이러저러하게 달라붙는 양상을 지켜보며 살았다. 끝까지 남는 누군가 있겠지. 부질없는 짓. 인간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모두 다 똑같다. 유닛이 지닌, 혹은 지닌 것으로 알려진 성속(聖俗)이 시공에 요동칠 뿐이다. 

스탠리 밀그램의 [권위에의 복종]이라는 책에서 인간 행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단서를 찾아냈다. 
“비록 파괴적인 성향이 우리가 본능적으로 타고난 부분이라 할지라도 그 성향은 실행 주체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전쟁 시 군인이 도시에 네이팜탄을 쏟아 부어 수천의 죄 없는 사람들을 몰살시키는 비행사라 해도 군인은 지배적인 여론이나 그들의 정부에서 죽이라고 하기 때문에, 그리고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의무 때문에 살인하는 것이다. 희생자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은 실행자의 파괴적 성향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빠져나갈 수 없는 사회구조에 대한 그들의 심적 통합 때문인 것이다”
가끔 세상은 의도와는 다른 결과를 내놓고 그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기도 한다. 좋은 뜻을 지녔을지언정 사건은 선악을 고려하지 않는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끄집어낼 수 없다. 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잘못일 수 있다. 어쩌면 인간 자체가 문제일 수 있다. 

 
 

1980년대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작품이라 하여 극장을 찾은 적 있다. 한창 때의 나스타샤 킨스키가 나오는데도 관객은 많지 않았다. 
영화는 한 사내가 황량한 길을 무작정 걸어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무작정 걸어간다고 목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사내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만난 텍사스 주 작은 도시 파리, 어떤 사람들은 과거로 돌아가려는 wish한(불가능하지만 간절한) 염원을 지니고 산다. 그곳으로 돌아가 잘못된 바를 돌려놓고 뭔가 바꾸려는 염원이 깊기 때문이다. 가능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 어쩌지 못한다. 트래비스의 목적지는 자신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처음 만난,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가야한다면 파리텍사스였다.

세상은 우리 언어와는 다른 소스로 코딩되었다. 내가 삶을 사용하면서 깨달은 점은 대부분의 사람이 의지를 사용하면서 그것을 진실이라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진실은 그게 아니다. 그런 진실은 사회가 만들어낸 것이거나 유전자가 만들어낸 것이 대부분이다. 패러다임이나 환경이 바뀌면 다 무너질 것이다. 특정 권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그 노선을 따른다. 
의지나 생각은 조건이 만들어낸 배열에 불과하다. 영남이나 호남, 일본이나 남미, 유럽에서 태어나 자란 유닛은 그들 문화와 풍토와 가치, 정서를 따르고, 이것은 어디나 마찬가지다. 다른 쪽에 태어났더라도 결과는 바뀌지 않는다. 단지 그 권역의 집단표상이 거기에 있을 뿐이다.

인간은 세상의 비의(秘意)를 알 수 없고 언어로 설명할 수 없다. 한 마리 개미는 보잘 것 없지만 집단이 만들어내는 지혜는 대단하다. 존재가 단위를 형성해 자기조직화를 이루는 경우 그곳에 어떤 유의미한 단서가 구성된다. 우리의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세상 저 끝에는 연민만이 남을 뿐이다. 나이가 세상을 말하게 된다. 20대 나이로 아는 세상과 50대, 70대 나이로 이해하는 세상은 다르다. 같은 사건도 다른 사건이 된다. 세상의 일은 합리적인 것도 아름다운 것도, 우연도 필연도 아니다. 

 
 

라이프니츠는 자연은 모두 예정된 바를 실어 나르는 운동량이라 생각했다. 라이프니츠에게 있어 태어남은 발현에 불과했고, 죽음은 거두어들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단자론에서 “따라서 완전한 탄생도 완전한 죽음도,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는 그런 죽음은 없다. 내가 태어남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펼쳐지거나 자라는 것에 지나지 않고, 내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은 감싸거나 거두어들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라이프니츠는 윤회설을 신봉했는데, 일반의 윤회설과 다른 점은 영혼이 바로 신체의 형상(a soul, as the form of its body)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전생의 귀결로 현세에 태어나 자라다가 수용되어 같은 신체에 다시 되살아난다는 그의 윤회관은 결국 단자(모나드)란 고나드(monads are gonads)라는 해석을 낳게 하였다. 
인간의 신체는 단지 생물학적 조합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생전이나 생후에도 물질이나 에너지로 현존하나 다만 모이고 흩어져 형태가 바뀔 뿐이고, 그 형태는 우리의 생각처럼 불멸이나 영생, 또는 부활이 아닌 생식선(生殖腺)의 거의 무한의 정보를 통해서이며, 이는 DNA를 뜻하는 것이라고 라이프니츠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주장하였다. 
라이프니츠는 흩어졌다가 모이고 다시 흩어지는 그런 윤회를 머리에 그리고 있었고, 이것은 식물 생태 사이클과 유사하였다. 엉겅퀴나 애기똥풀이 태어나 모이고 흩어져 썩는 그런 순환을 머리에 그리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는 행복한 세상을 그리는 경향이 있고 이를 정상으로 여긴다. 그러나 얼마간의 블행한 유닛이 필요한 것 또한 정상이다. 안타깝지만 진정한 선의나 착함, 노력도 허물어뜨려야 바름이 된다. 나쁜 사람도 필요하고 죄 없는 사람도 죽어야 한다. 그래야 신의 정의가 세워진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이유로 신의 부재를 주장하지만 그러나 그게 아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신의 존재가 요구된다. 미학자 월터스토프는 이렇게 쓰고 있다. “고통의 골짜기에는 절망과 쓰라림이 양조(釀造)된다. 그러나 또한 품격도 제조된다. 고통의 골짜기는 성숙한 영혼을 빚어내는 계곡이다”
불행은 불가피한 것이다. 유태인은 악마를 신의 심부름꾼으로 이해했다. 그들을 곳곳에 세워놓음으로 세상의 질서가 바로 세워지는 것이라 믿었다. 

기쁨보다 고통을 먼저 선택하는 사람은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은 맛있는 기쁨을 먼저 선택하고 선호한다. 그래야 행복한 인생이고 좋은 세상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에 기쁨만을 세워놓을 신은 없다. 신은 바보가 아니다. 그런 세상은 파멸과 멸망 외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불행과 나쁨을 세워놓지 않으면 세상은 더 처참한 상태로 떨어진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티벳의 순례자들은 아득한 곳에서 아득한 곳까지 걷는다. 어느 시대나 불행이나 고통은 본질을 남긴다. 이쪽 진리가 저쪽 진리와 정확히 맞아떨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같은 높이에서 떨어지는 동전도 똑같은 자리에 떨어지지 않으며, 나뭇잎은 각기 다른 무늬를 지니고, 모래, 먼지, 입자, 쿼크 모두 다른 모양을 갖는다. 우리 눈에 같아 보이는 개미들도 그들 세계에서 완벽히 다르며, 천억의 별, 모두 다른 밝기, 다른 위상을 지닌다. 

인간을 만드는 것은 단위다. 그 단위가 기독교라면 기독교적인 유닛이 만들어지고, 이슬람이라면 이슬람적 유닛이 만들어진다. 이는 그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화학반응과 같다. 인간은 사슬이나 고리에 불과하며 정보 전달 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다. 어느 곳에서나 집단표상은 유닛의 문법이 되고, 그러므로 천 년 후 진실은 오늘의 진실과 다르다.
과거의 사람들도 우리와 비슷하게 살았다. 인더스 문화권의 많은 사람들은 불행을 업으로 여기며 살았고, 한반도에 거주한 대부분의 사람은 그들의 문화와 종교와 풍토에 적응하며 살았다. 우리는 유닛이다. 유닛은 정보를 통해 그것으로 이유를 만들어낸다. 우리에게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의 상당 부분은 사회가 우리에게 요구한 것이거나 내재된 욕구에 따른 것이다. 여기에 인간이 있다.

인간은 시대의 지평에서 삶을 살고 그 지대에서 죽는다. 세상 모든 유닛에게 세상은 어떤 프레임을 갖는다. 그 프레임 안에 해야 할 바 있고 가야할 곳이 있다. 그 가운데 어느 유닛은 wish한 염원을 지니고 산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가야 한다면 파리텍사스일 수밖에 없다. 그 wish한 염원을 안고 생각한다. 왜 창조주는 이런 세상을 만들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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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인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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