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제르망 데 프레의 줄리엣 그레코다큐멘터리 사진의 거장 로베로 두아노의 1947년 작품이다. 그는 생제르망 거리를 걷던 당시 20살의 줄리엣 그레코를 발견 사진을 찍었다. 보헤미안 분위가 물씬 풍기는 이 한 장의 사진으로 그레코는 생제르망의 상징이 되었다.
생제르망 데 프레의 줄리엣 그레코다큐멘터리 사진의 거장 로베로 두아노의 1947년 작품이다. 그는 생제르망 거리를 걷던 당시 20살의 줄리엣 그레코를 발견 사진을 찍었다. 보헤미안 분위가 물씬 풍기는 이 한 장의 사진으로 그레코는 생제르망의 상징이 되었다.
줄리엣 그레코와 천재 재즈 뮤지션 마일스 데이비스.두 사람은 친구이자 연인이었다. 생제르망이 세계 문화의 중심이었던 시절, 이들은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
줄리엣 그레코와 천재 재즈 뮤지션 마일스 데이비스.두 사람은 친구이자 연인이었다. 생제르망이 세계 문화의 중심이었던 시절, 이들은 가장 빛나는 존재였다.

나치의 침공으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어머니는 레지스탕스로 나가 체포되어 강제수용소로 끌려갔고, 연기 수업을 받던 열두 살 소녀는 외할머니가 보살피게 되었다. 마침내 소녀도 열다섯 살 때 언니와 함께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가 게슈타포의 밀고로 체포되어 파리 외곽의 악명 높은 수용소에 갇혔는데, 나이 어린 동생이 먼저 석방되었다. 돌아갈 집이 없어졌고 가진 것이라곤 입고 있던 옷 한 벌밖에 없었다.
궁리 끝에 어머니의 친구를 찾아가게 된다. 혹독한 추위에 벌벌 떨며 8마일을 걸어 파리 시내로 들어가는데, 어머니의 레지스탕스 동료이자 배우였던 엘렌 뒤크는 오갈 데 없는 친구 딸에게 거처를 마련해주고 얼마간 먹을 것을 대주었다. 파리 제6구 ‘생제르망 데 프레(Stgemain Des Pres)에 대책 없이 내던져진 이 어린 아가씨의 이름은 훗날 샹송의 레전드이자 전후 프랑스 문화의 아이콘이었던 줄리엣 그레코(Julie Greco. 1927~2000).

「보헤미안의 심볼, 생제르망에 나타나다」
그레코는 사귀던 남자 친구에게 코트, 점퍼, 셔츠, 바지를 얻어 입었는데, 옷은 모두 검은색이었고, 너무 커서 걷어서 입어야 했다. 그 희한한 차림으로 방직공장에 다니고, 전화교환수 생활도 하면서 틈을 내어 국립극장으로 연기수업을 받으러 가곤 했는데, 집과 일터와 극장을 오가는 길에 종전 후 보헤미안의 메카로 부상한 ’생제르망 데 프레‘ 지역의 환상적 분위기에 취해 가슴이 설렜다. 이곳은 자신의 내면에서 터져 나오려고 하는 온갖 끼들을 안아줄 것만 같았다.
이제 막 나치 점령하에서 풀려난 센강 좌안의 생제르망 지역은 예술과 지성의 천국이었다. 프랑스는 물론이고 유럽 여러 나라들과 미국에서 앞으로 전후 시대를 이끌어갈 젊은 천재들이 생제르망으로 몰려왔고, 서울의 한 동네 정도에 불과한 이 작은 지역은 장차 세계의 대가가 될 작가, 사진가, 패션 디자이너, 미술가, 철학자... 프론티어들로 넘쳤다. 그들은 카페, 바, 식당, 갤러리, 서점에서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가고 있었으며, 그때의 생제르망은 전후 세계문화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검고 긴 생머리에 낡고 펑퍼짐한 블랙코트, 블랙셔츠, 블랙팬츠, 블랙슈즈 차림의 그레코는 시간 날 때마다 생제르망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것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매력적인 패션이었으며, 그레코는 당연히 사람들의 눈에 띄었고, 그때 생제르망에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ri Carter Bresson), 등 20세기 다큐멘터리 사진의 기수로 떠오르던 작가들이 진을 치고, 이곳의 자유분방하고 방랑적인 분위기를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줄리엣 그레코의 사진을 찍었고, 특히 로베르 두아노가 찍은 사진은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는데, 개 한 마리와 함께 생제르망 데 프레 성당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한 사진은 왠지 쓸쓸해 보이고 묘한 신비감을 일으키는 여인은 이 지역의 보헤미안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었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파리 시내가 들썩였으며, 생제르망을 배회하는 검정 의상의 보헤미안 여인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들 정도였다. 

「그레코, 사르트르를 만나다」
그레코는 일터를 생제르망으로 옮겼다. 그때 생제르망의 도핀 거리에 ’타부(Tabou)’라는 이름의 재즈클럽이 생겼는데, 이곳에 드나들다가 노래를 부르고 춤도 추는 신예 가수가 된 것이다. 이 일자리는 그레코에게 최고의 선택이었으며, 재즈클럽 타부는 실존주의 철학의 거장 장 폴 사르트르와 더불어 전후 프랑스의 최고 천재로 꼽혔던 보리스 비앙(Boris Vian. 1920~1959)이 주도했다.  그는 소설가이자 시인, 또한 가수 트럼펫 연주자, 번역가, 비평가, 발명가, 공학자로 전후 프랑스에 지울 수 없는 발자국을 남긴 인물이었으며, 그는 미국의 재즈 명인 마일스 데이비스를 이 클럽으로 불러들여 프랑스 재즈의 빛나는 한 시대를 열었다. 
원래 이 클럽은 1690년에 설립된 유서 깊은 카페였다. 루소, 볼테르, 몽테스키외 등 걸출한 철학자들이 드나들던 명소였는데, 종전 후(1946년) ‘타부(Tabou)’로 이름을 바꾸고 재즈를 연주하는 술집이 되었다. 이 클럽에는 사르트르, 보부아르, 까뮈, 시몬 시뇨레(배우), 세르주 갱스브르(작곡가, 가수), 프랑소와 사강(작가), 오손 웰스(작가) 등 젊은 거물들이 찾아와 재즈를 즐기면서 자욱한 담배 연기 속에 술 마시고 춤추고, 토론하며 밤을 새우곤 했는데, 줄리엣 그레코는 단번에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들 중 세르주 갱스부르, 오손 웰스, 마일스 데이비스 등과는 연인관계였고, 프랑소와 사강은 동성의 절친이었으며, 사르트르와 보부아르는 후견인이 되었다. 
특히 사르트르는 그레코의 천부적 재능에 주목했는데, 그레코의 스타일과 음색에서 한 줄기 거대한 재능에 주목했다. 인습에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성향 방항적인 기질, 절대빈곤의 상황에서 삶을 개척해가는 모습 등에서 실존주의적인 삶의 태도를 발견했다. 이미 ‘반(反)신학대전’이라 불리는 대저술 <존재와 무>를 출간해 세계의 지성으로 떠오른 사르트르는 인간의 자유로운 삶을 구속하는 모든 것들에 맞서 싸우는 전사였고, 지금 주어진 현실 속에서 할 수 있는 한 최고의 선(善)을 향해 분투하라고 세계 시민들에게 촉구하고 있었다. 인간의 자유를 가로막는 모든 인습에 저항하라는 메시지를 던지면서 그 자신이 모법을 보였다. 
그런 사르트르의 눈에 비친 그레코는 자신의 철학적 대의를 샹송으로 표현해줄 수 있는 존재로 비쳤다. 사르트르는 마치 시를 읊는 듯한 그레코의 몽환적인 비음을 가리켜 “그녀의 목소리에는 수백만 개의 시가 들어 있다”고 했고, “그레코의 노래 속에는 꺼져가는 우리 내면의 불씨를 소생시켜주는 따뜻한 빛이 깃들어 있다. 나는 그녀를 위해 노랫말을 썼고, 그 언어들은 그녀의 입을 통해 비로소 빛나는 보석이 되었다”고 최고의 찬사를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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