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 성 만
문필서예가 림 성 만

깨어 있다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깨어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수레와 헛간으로 피할 때/ 그대는 구름 밑으로 피하라/ 밥벌이를 그대의 직업으로 삼지 말고 도락으로 삼으라/ 대지(大地)를 즐기되 소유하려 들지 말라/ 진취성과 신념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이 지금 있는 곳에 머무르면서/ 사고팔고 농토처럼 인생을 보내는 것이다.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은 음양오행(陰陽五行)과 지(地), 수(水), 화(火), 풍(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생성과 변화, 발전, 소멸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따라서 공간성을 갖는 감각 세계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언젠가는 사라져갈 수밖에 없는 필연적 관계이자 우주의 섭리이지만 그 본질은 비어 있다.

불교의 기본 사상을 함축하고 있는 반야심경에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는 구절이 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은 비어 있는 것이요, 비어 있는 것은 곧 물질이다”는 뜻이다. 따라서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의 본질은 하나의 파동으로서 ‘우주 속의 삼라만상은 모두 텅 비어 있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비어 있음(空)은 무(無)가 아니라 진공묘유(眞空妙有)다.

 

대나무의 외형적 상징성인 색(色)을 공(空)으로 승화 시키기 위해 바람을 이용했다. 바람은 언제나 비어 있으므로 실체는 보이지 않지만, 그러나 분명한 파동과 주파수를 갖고 있으므로 가시적 사물을 움직일 수 있고 때론 엄청난 파괴력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비어 있음은 곧 물질‘인 것이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실바람에 대나무 잎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하늘하늘 춤을 추고, 어떤 때에는 몸을 가누기조차 힘든 폭풍이 휘몰아쳐 줄기와 뿌리까지 뒤흔들림 속에서 대나무의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바탕 바람이 휩쓸고 지나가고 나면 없었던 존재는 되살아나 내 감각기관을 자극하는데, 나는 이럴 땐 분신인 사진기를 가슴에 안고 춤을 춘다. 그러면 존재하지 않던 대숲은 고스란히 사진기 속으로 빨려 들어와 공(空)으로 머문다. 대나무는 사시사철 푸른 빛과 선비에 비견되는 곧고 강인함을 갖고 있지만 중심을 이루고 있는 속은 항상 텅 비어 있어 이 또한 언제나 ’공(空)하다‘.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인데, 그것도 숲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유롭고 행복하게 사는 것의 아름다움을 몸소 체험하는 것인데, 대나무의 사랑을 보았는가. 대나무는 철저하게 고독을 즐기는 나무, 사랑할 줄을 모르는 나무이다. 대나무는 사랑하지 못하는 나무, 사랑하려고 하지 않는 나무이며, 자식을 낳지 않으려 작정한 나무이다.

 

꽃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결실이다. 사랑하지 않는 대나무는 꽃을 피울 수 없다.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나무는 결국 꽃을 피우기는 하지만, 사랑을 위해서가 아니라 죽음을 위해서 꽃을 피운다. 한번 꽃을 피우고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숙명을 가진 나무이다. 집 베란다에 까만(烏竹) 대나무를 키우는데, 이게 정말 예민하다.

아침 저녁으로 돌봐야 하는데, 특히 중요한 건 배수다. 물주고 어느 정도 물이 배수되는 시간이 적당해야 하는데, 그 적당함이 애매하고 예민하다. 더구나 자연적 기후를 맞춰야 잎이 푸르며 건강하고 반듯한 것이다. 겨울엔 분채로 땅에 묻어 최소한 자연적으로 가는 건데, 그래도 아침 저녁 문안을 하지 않으면 선비가 좋아했던 대나무는 요원하다.

 

꽃, 대나무 꽃은 피우는 방법도 특이한데, 다른 대나무가 꽃을 피우면 덩달아 꽃을 피운다. 너도 피니까 나도 핀다는 자기 동화다. 그리고 모두 죽는다. 너도 나도 꽃 시절을 모두 함께하고 모두 죽는다는 동화 정신의 결정체이다. 어떤 대나무는 30년, 60년, 120년, 대나무가 그 시절에 그렇게 죽어야 하는지 캐낸 사람도 그 이유를 밝힌 사람도 없다. 우리는 지금 살아있는 대나무를 보고 만지고 사랑하고 그 덕을 칭송하지만 그 죽음을 캐고 알고 밝히는 미래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태안의 대나무 중에서, 백화산 자락 민가에서 40여년 전에 꽃이 피었다가 전부 죽는 걸 보았는데, 다행히 사진으로 남겨두어 희귀한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그 때 꽃과 죽음을 본 나 외에는 아직까지 우리에게 대나무의 탄생과 사랑과 죽음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안타까운 일로 남는다. 우리가 함부로 대나무를 이야기하지만 대나무는 이렇듯 자기 탄생과 사랑과 죽음까지를 수수께끼로 남겨둔 신비한 나무인데, 하물며 우리는 다른 생명을 이렇다고 말할 준비를 갖추고나 있는 것일까. 자연은 우리보다 더 진화한 생명의 보고이다.

 

대숲에 들어가 가만히 대숲 바라보면/ 사철 푸르를 것 같지만 또 다름 느끼고/ 시절보낸/ 댓잎끝 애처롭게 갈라져 있어도/ 새이파리 봄날이면 푸르게 돋아나는데/ 여름엔 왕성한 가지를 가져다 주는구나/ 겨울 이겨내기 위해 가을엔 진중해지고/ 다시 겨울이면 아리지만 숨고르는 고독이/ 자연의 위대함과 대숲의 과정 다르지 않구나

모진 바람에 휠지언정 절대 꺽이지 않고/ 꿋꿋하게 견디는 그 과정 눈물겹지 않은가/ 미약한 우리 인간만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무책임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아픈 상처만 기억하는 인간 군상의 세계 속/ 대숲 생각하지 못하고 대숲에 들어간다는 것은/ 행간의 비움 이해하지 못하는 것 아닐까

견고하다는 것과 대쪽같다고 말할 때/ 우린 흔들림 없이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데/ 대숲엔 바람불지 않아도 미세한 떨림이 있고/ 곧은 절개와 지조가 부드러움 품은 채/ 서로 부딪치면서도 절제와 양보가 있으며/ 사철 배려와 겸허함이 베어 숨쉬는/ 오호라 변하지 않는 모습의 그 숭고함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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