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 성 만
문필서예가 림 성 만

‘비가 와도 갈 곳이 있는 새는 좌우로 난다’
계절적으론 여름이 다 지나간다는 ‘말복’과 가을이 돌아온다는 ‘입추’도 지나고 늦장마에 비도 추적추적 내리는데, 파전에 막걸리 한 잔이 생각납니다만 더위에 선풍기 껴안고 자다 보니 철없는 감기로 며칠째 고생하는 서러움이란 아마 모를 겁니다.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니 비가 오는데도 불구하고 작은 새들이 이리저리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먹이와 잠자리가 필요할 텐데 이렇게 비가 내리면 그것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나름의 방법이 있지 않을까요. 그렇지만 한편으론 걱정이 들기도 합니다. 그것들이 건강해야 해충도 없애주니까 하는 말입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집안, 때론 고요해서 그것을 즐기기도 하지만 서러울 때도 있는 것을 숨길 수는 없습니다. 얼마 전에 서울에 잠깐 들렸다가 부채 장인이 만든 부채 몇 점을 구해와 오늘 그림을 그리고 채색한 후 시를 지어봤습니다. 낙관까지 마무리하니 여름이 더 살갑고 가을이 기다려지는 기분인데, 부채를 흔들지 않아도 그림을 보면 푸르른 산이 내게 다가오고,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기분을 아마 모를 겁니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가을이 서서히 다가오는 거죠. 개인적으로 저는 가을을 무척 탑니다. 가을을 좋아한다는 표현보다 탄다는 동사를 사랑하는데, 그 이유는 딱히 말할 순 없지만 우선은 제가 하는 작업에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시와 그림, 서예, 음악, 이 모든 것이 가을이면 더 몸에 다가오고 절절하기에 눈물까지 저절로 나오는 건데, 아직 철들이 못한 나이 먹은 소년일까요. 아닐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그 느낌을 옮기지 못하는 것 아닐까요.
건강상은 아니겠지만 요즘 조금은 나약해지는 느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나보다 더 나이 많은 분들이 들으면 웃을지 모르지만 제 나이에선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제겐 가을이 있어서 행복하다면 이해하실지. 그냥 그렇게 기억하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거친 시련이 다가와도 견뎌내는 힘이 있는 건 우리 인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약하고 어리기만한 인간성도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음이지요.
이쯤에서 자연의 위대함을 기억해 봅니다. 장마 지나고 노을이 더 선명하게 짙어 보이는 건 긴 비에 씻길 대로 씻긴 하늘과 구름이 한결 맑아졌기 때문인데, 쩍쩍 갈라졌던 논이며 메마른 길에 장맛비가 지나가 곳곳이 패이고 부서지곤 했지만, 물길을 따라 새로운 길이 생기기도 합니다. 하지만 뜨거운 태양빛을 받아 자란 논밭은 한층 푸르게 우쭐대며 가을을 예비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조금은 편해집니다. 

가난을 딛고 학문에 열중한 사람으로 흔히 진나라의 차윤과 손강을 듭니다. 차윤은 여름밤에 반딧불에 의지해 책을 읽었고, 손강은 겨울밤에 눈빛 아래서 글공부를 했죠. 훗날 차윤은 상서랑에 올랐고 손강은 어사대부가 되었으니, 이로부터 형설지공(螢雪之功)이라는 유명한 고사성어가 탄생합니다. 시골에서 자란 사람에게 반딧불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인데, 초가지붕 위로 날아오르던 황홀한 불빛을 두고 이봉순 시인은 ‘어느 천사의 넋이기로 한밤 기다려 별과 함께 피뇨’라고 노래했습니다. 그것은 또한 도깨비불에 얽힌 수많은 전설을 통해 소년들의 동심을 비추던 정겨운 불빛이기도 했습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육상 생물 중 유일하게 스스로 빛을 내는 반딧불은 예부터 영험스러운 곤충으로 통했습니다. 중국에선 병귀와 액귀를 막아준다 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칠석날 반딧불을 잡아 고약을 만들면 백발이 흑발로 바뀐다 했습니다. 누에 치는 방에 반딧불을 풀면 쥐가 얼씬거리지 못한다 했고, 푸른 반딧불이 집안에 날아들면 조만간 길한 일이 생긴다고도 했습니다. 반딧불은 깨끗함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오직 일급수에서만 서식하고 물이 조금이라도 탁해지면 곧바로 자취를 감춰버립니다. 주요 먹이인 다슬기와 민달팽이 역시 오염된 곳에서는 살아갈 수 없는 거죠. 산업화 이후 개체수가 급감하면서 한때 개똥벌레라 불릴 만큼 지천이던 반딧불은 어느덧 전북 일대의 서식지까지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습니다. 
요즘의 칠석날에 고약을 만들 만큼 반딧불이 흔하지도 않고 설령 눈에 띄더라도 함부로 잡을 수도 없는 세상이 되었지만, 한국인에게 반딧불은 여전히 환경과 문화를 연결하는 소중한 정서적 상징물인 거죠. 잔치처럼 여름밤을 수놓으며 견우직녀의 밤길을 밝혀주던 그 신비한 군무(群舞)를 언제쯤 다시 구경할 수 있을까요. 음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고 견우와 직녀가 만날 때 칠흑같던 어둠을 밝혀주는데, 직녀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견우를 생각이나 하고 있을까.

‘감당 못하는 서늘한 바람, 지금 그 바람이 불어옵니다’
뜨거웠던 지난 여름을 뒤로한 채, 아침과 저녁으론 제법 서늘한 바람이 불어옵니다. 들길엔 이름 모를 예쁜 꽃도 하나둘 피어나고 풍요로운 계절이 마음을 넉넉하게 하는데, 자연의 아름다움에 그저 감탄사뿐입니다. 그러나 우린 계절의 아름다움을 잊고 살지는 않는지, 아무런 느낌 없이 지나치는 것 같지만 내 몸은 언제나 그것을 느끼지만 왜 우린 기억의 저편처럼 망각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들길은 아이들이 흰 구름과 누가 빨리 가나 내기라도 하듯 달려가는 길입니다. 하굣길 아이들이 신발주머니를 바람개비처럼 돌리며 집으로 달려가는 길이며, 때로는 어머니가 한 소쿠리 감자를 캐어 머리에 이고 오는 길이기도 한데, 그런 들길에 여름내 흙을 좋아하던 흑염소처럼 얼굴이 까맣게 탄 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달려가면 가을이 시작됩니다. 이제 가을 들길엔 풍성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촘촘히 익어가는 옥수수, 풍금소리로 밀려오는 나락들, 꼬투리마다 여무는 콩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며, ‘여름의 남은 불씨’들은 고추밭에서 활활 타고, 능금은 빨갛게 익어갑니다. 가을은 언제나 그렇듯 아이들이 달려가는 들길에 맨 먼저 찾아오는데, 아이들처럼 즐겁게 자전거 은빛 바퀴를 굴리며... 모기 입도 삐뚤어진다는 ‘처서’도 지나고, 모두 행복한 가을을 맞이하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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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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