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동남소방서 오경진 서장
천안동남소방서 오경진 서장

무학대사(無學大師) 자초(自超)는 고려 말~조선 초에 활동한 불교 승려이다. 지공(指空)에서 나옹혜근(懶翁慧勤)으로 이어지는 법맥을 전해 받아 저들과 함께 고려 말 삼화상(三和尙)으로 일컬어진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에게 깊은 존경을 받아 조선의 처음이자 마지막 왕사(王師)가 되었다.
무학대사의 출생이나 성장 등과 관련한 전설이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있다. ‘학이 날개로 보호한 어린아이’, ‘무학대사와 간월도 무당사(無學大師와 看月島 無堂寺)’, ‘토끼섬과 무학대사’, ‘무학대사가 잡아준 묫자리’와 같은 설화들이 전하며, 그중 대사의 신이한 탄생 및 이름과 관련한 ‘학이 날개로 보호한 어린아이’가 유명하다.
무학대사는 서산의 인지면 모월리에서 태어났는데,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아버지가 나라에 진 빚을 갚지 못해 쫓기는 처지가 되었다. 그래서 포졸들이 그의 어머니를 대신 잡아가는데 도중에 갑자기 산기가 있었다.
온 산천이 눈으로 덮였는데 마침 한 곳에 눈이 없어 해산을 하고, 아기를 옷가지로 덮어놓은 뒤 현청에 갔다. 현감은 사정 이야기를 듣고 무학의 어머니를 풀어 주었다.
어머니가 달려와 보니 큰 학이 두 날개를 펴서 아기를 감싸고 있었다. 이에 감격한 어머니는 아이의 이름을 ‘무학’(舞鶴)이라 지었고, 아이를 낳은 곳은 그 뒤로 ‘학이 돌본 고개’라고 하여 ‘학돌재’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대사의 어머니가 해가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을 하여 대사를 낳았는데,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나 배움에 있어 대사를 앞서는 사람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문에 의하면 무학대사는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혜감국사(慧鑑國師)의 제자 소지선사(小止禪師)에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혜명국사를 찾아가 불법을 배우며 용문산 부도암에 머물렀는데 『능엄경』을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더욱 수행과 공부에 정진하였다.
이후 진주 길상사와 묘향산 금강굴로 거처를 옮겨가며 공부에 게으르지 않다가, 스물 여섯 살이 되던 1353년 가을에 원나라 수도 연경으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무학대사의 3년간의 원나라 유학기간 행적 중 특기사항은 지공과 혜근을 방문하여 도를 인가받은 일이다. 원나라에서 이루어진 이들의 조우는 우연하고 일시적인 만남이 아니었다. 
지공은 인도 마갈타국 출신의 고승으로 원나라 연경에 와서 법을 전하고 있었는데 고려에서 유학 온 혜근을 만나 선을 전수하는 인물이다.
무학대사는 귀국한지 3년 후인 1359년에 혜근이 귀국하여 머물고 있던 원효암으로 찾아가 불자(拂子)를 전수받았다. 이후 혜근이 신광사로 옮기자 무학도 그쪽으로 옮겨갔으나 그를 시기하는 무리가 있어 고달사 탁암에서 은거 수행하였다고 한다. 
1371년에는 혜근이 왕사(王師)로 책봉되자 송광사에 머물면서 무학에게 가사와 바리때를 보내주어 그 깨달음을 인가하였다.
「무학대사설화」 중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이성계와 관련된 설화이다. 이러한 설화는 조선조 창업을 천명(天命)에 의해 이룩한 정당한 것으로 부각시키려는 조선 왕조 지배층의 의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사회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비문 외의 자료에서 특기할만한 사건은 설봉산 토굴에서 은둔 수행하던 무학대사가 이성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무학대사와 태조 이성계의 인연은 휴정[서산대사](休靜(西山大師))가 쓴 『설봉산 석왕사기』 에 자세히 전한다. 
무학대사가 설봉산의 토굴에 숨어 이름을 숨기고 솔잎을 먹으며 칡베옷을 입고 수행하고 있었는데, 1384년 무렵 이성계를 만나 왕조 창업을 모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실록에서도 찾아지며, ‘석왕사(釋王寺)는 왕업이 일어난 곳’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설봉산 석왕사기』에서 전하고 있는 그들의 만남은 다음과 같다. 1384년이성계는 함경북도 남쪽의 학성으로 거처를 옮겨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상한 꿈을 꾸게 되었다. 일만 집의 닭들이‘꼬끼오’하고 일시에 울고 일천 집에서 일제히 다듬이 소리가 났으며, 낡은 집에서 서까래 셋을 지고 나오며 꽃이 지고 거울이 떨어져 깨지는 꿈이었다.
꿈이 하도 이상해서 이웃 노파에게 해몽을 부탁했더니 그 노파가 사양하며 흑두타라 불리던 수행자, 무학대사가 있는 곳을 알려준다.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방문하여 해몽을 듣게 되는데, 이 때 무학이 이 꿈을 임금이 될 것을 예고하는 꿈으로 풀이하였다는 것이다. 
일만 집의 닭 우는 소리는 높고 귀한 지위(꼬끼오=고귀위(高貴位))를 축하하는 것이고, 일천 집의 다듬이 소리란 임금을 모실 사람들이 가까이 이르렀음을 알리는 것이며, 꽃이 지면 열매를 맺고 거울이 떨어지면 소리가 나는 법, 또 서까래 셋을 사람이 지면[負] 임금‘王’자(字)가 된다고 하였다는 해몽이 바로 그것이다. 
해몽 후 머물던 절의 이름을 왕의 꿈을 해석한 절이라 하여‘석왕사(釋王寺)’라 하고, 3년을 기한으로 5백 성인을 모셔다 재를 드리면 왕업을 이루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하여, 이성계는 그 자리에 절을 짓고 3년 동안 큰 불공을 드렸다고 한다.
무학대사의 우리 태안지역에 대한 인연을 소개해보면 안면읍 소재지 남쪽으로 77번 국도를 따라 가다보면 방포사거리가 나오며 사거리에서 서쪽으로 1㎞ 남짓 떨어진 곳에 방포항이 있다. 
방포 남쪽으로는 드넓은 꽃지 해변이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는 두에기-밧개 해변이 이어지며 서해에서 방포항으로 진입하는 어귀에는 할미바위·할아비 바위가 호젓이 솟아있다.
방포의 옛 지명은 젓개이다. 전설에 따르면 마을 북쪽의 야트막한 산에 무학대사가 공부하기 위해 지은 절(寺)이 있었다고 하며, 이 절의 불빛을 보고 배들이 다가오다가 암초에 걸려 사고를 당하는 일이 빈번하였고, 그 이유는 악천후에 이 앞을 지나는 선박들이 무학대사의 절에 켜진 불빛을 등대로 착각하고 그 불빛을 따라 가까이 들어오다가 암초에 걸려 파선되기가 예사였기 때문이다. 
이를 뒤늦게 알게 된 무학대사는 더 이상 선원들이 희생되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어 결국 절을 허물고 간월도로 떠났고, 이후에 마을에서는 절이 지어졌던 곳을 가리켜 ‘절개’라고 하였으며, 이후에 ‘젓개’가 되었다.
무학대사와의 인연(因緣)으로 이곳은 서해안 3대 낙조 명승지이며 사시사철 아름다운 낙조를 감상하기 위해서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며 연말연시에는 해넘이·해돋이 행사로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 되었다.
태안반도는“자세히 보아야 아름답다”라는 말이 떠오르는 아주 아름다운 도시라 확신합니다. 그런 아름다움을 받치는 길고 긴 역사와 전통속에 무학대사와 태안반도의 인연(因緣)이 저에게 크나큰 흥미로 다가왔고 꽃과 바다의 도시로 아름다운 자연환경이 조화를 이룬 태안에 관광객이 더욱 많이 방문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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