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 성 만
문필서예가 림 성 만

지금 바빠 죽겠는데
왜 꽃들은 피고 난리여
그러나 언제 피고 질지
꽃이나 그대 인생이나

순천 선암사의 선암매, 구례 화엄사의 화엄매, 장성 백양사의 고불매(古佛(梅), 그리고 강릉 오죽헌의 율곡매, 천연기념물 매화 중에서 유일하게 홍매인 백양사 고불매는 그 시점에서 아직 울음을 터트리기 전이었고, 일부는 활짝 피었지만 다른 가지에는 꽃망울이 눈물처럼 방울방울, 화엄매와 선암매도 아직 만개(滿開)까지는 조금 남은 시점이었다. 
선암사 승범 스님은 "일찍 피고 화려한 일본 매화와 달리, 한국 토종 매화는 늦게 피는 대신 향이 깊다"고 했다. 이르면 2월에도 꽃을 피우는 전국의 이름난 매화 마을보다, 산사의 고졸(古拙)한 매화가 지각 개화를 하는 첫 번째 이유다. 산중이라 상대적으로 봄을 늦게 만나는 까닭도 있다. 강릉 율곡매를 제외하고, 선암매 화엄매 고불매는 각각 조계산 지리산 백암산의 자식이다. 서울보다 평균 5도는 더 낮은 곳에서 태어난 산중 매화이기에 더 특별한 것으로 나는 지금 남도 꽃대굴에 묻혀있다. 아함.
많게는 600년의 나이를 먹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선암사 선암매, 탐매로 이름난 남도의 소설가 문순태는 "꽃이 피고 진 600년의 아득한 시간은 소멸이 아니고 깨달음이었으리라"고 쓴 적이 있다. 원통전 오른쪽 길, 운수암 가는 길에 피어난 홍매와 백매가 아득하다. 그 길 가득한 600년의 깨달음을 깊은 호흡으로 들이마신다. 매화는 마음으로 보고 귀로 듣는 꽃이라고 했다던가.
선비들은 매화 한 송이를 복사꽃 일만 송이와도 바꾸지 않는다고 할 만큼 매화를 사랑했다. 고려시대 학자 이인로(1152~1220)의 매화시편 한 구절이다. '고야산 신선 고운 살결에 눈으로 옷 지어 입고/ 향기로운 입술로 새벽 이슬에 구슬을 마시는구나/ 속된 꽃술이 봄철 붉은 꽃에 물드는 것 싫어서/ 신선이 사는 요대 향해 학 타고 날아가려 하는구나’
선암사 원통전 담장 너머로 아직 머리두건을 쓰지 않은 젊은 예비 수녀가 사진을 담는 모습이다. 하얗게 핀 매화 그 이상으로 환한 얼굴들이다. 매화가 빚어낸 종교 간의 대화. 꽃절로 이름난 선암사는 이미 탐매가뿐만 아니라, 꽃과 나무를 찾아온 탐방객들로 넘쳐난다. 600년 된 매화와 비슷한 시기에 심었다는 누워있는 소나무, 이미 고개를 뚝뚝 떨군 동백, 아직 자태를 뽐내지 않는 영산홍, 자산홍, 왕벚꽃, 처진 올벚나무….
세상에서 가장 바쁜 사람마저도 거부하기 힘든 유혹, 봄꽃 기행. 사실 이번 주말은 천지 사방이 꽃이다. 탐매로 한정한다면, 4월 20일에야 당신 앞에 도착할 이 편지는 실패한 프러포즈가 될지도 모른다. 어떤 절에서는 이미 매화가 절정을 넘어 난분분 낙화를 마쳤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다시 한 번, 이번 주말은 동서남북 사방팔방이 꽃이리라. 천년 고찰뿐만 아니라 서울 구석구석까지.
선암사에서 하룻밤을 보낸 뒤, 새벽 공기를 마시며 뒤편 편백나무 숲으로 향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숲 속. 해를 등지고 선 목련이 단 한 송이도 꽃을 피우지 못한 채 수줍은 봉오리를 물고 있었다. 이번 주말, 당신이 와주신다면, 그때 환하게 웃으며 피어날 수도 있겠지. 편지를 서랍에 넣어둘지, 봉투를 뜯을지 결정 여부는 결국 그대의 몫이 아니던가.
「순천 선암사」 절 앞의, 무지개 모양 아치형 돌다리 승선교(昇仙橋·보물 제400호)를 먼저 건넌다. 고통의 세계에서 부처의 세계로 건너가는데, 우리나라 절집이 빚어낸 최고 풍경 중 하나다. 30여개 전각(殿閣)으로 꾸민 선암사는 1500년 세월을 오롯이 품은 조계산의 고찰이다. 내 마음속 문화유산으로 한글·청자·산사를, 그중 산사의 대표로는 선암사가 아니던가. 계단식 가람 배치는 그야말로 절정이다. 
만세루에서 계단을 오르면 대웅전이 드러나고, 다시 한 계단을 오르면 팔상전, 여기서 또 한 계단을 오르면 원통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수령 600년의 천연기념물 매화는 원통전 담장 뒤편에 있다. 그 오른쪽, 운수암 가는 담길에 백매 홍매가 어울려 피었다. 한국 토종 매화나무 50여그루가 부처님 미소처럼 환하다. 관세음보살 나무아비타불
꽃절 선암사는 여름까지 꽃이 지지 않는다. 3월 마지막 주말은 홍매, 백매와 목련, 그리고 아직 떨어지지 않은 동백의 계절이었다. 이제 곧 영산홍, 자산홍, 처진올벚나무가 자신의 계절을 선언할 것이고, 그다음이면 모란꽃도 만개하겠지. 무량수각 앞에 길게 누운 650년 된 소나무, 칠전 차밭의 700년 넘은 차나무도 모두 선암사의 주인이다.
단청은 바랬지만 바랜 대로, 나뭇결은 닳았지만 닳은 대로 아름다웠다. 아쉬운 것은 사찰 곳곳이 모두 돌아볼 수 없다는 점, 뒷간으로는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선암사 해우소가 볼거리였다. 건축가 김수근이 대한민국 최고라고 엄지를 치켜세웠다는 그 뒷간이다. 원통전의 소박한 모란꽃살문도 잊을 수가 없으며,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시는 전각으로, 선암사 원통전에는 조선 순조가 직접 대복전(大福田)이라는 현판을 내렸다.

「구례 화엄사」 선암사에서 1시간 남짓 북쪽으로 달리면 화엄사다. 아침 8시 무렵, 화엄사로 올라가는 길은 안개가 가득하였다. 부처님의 세계, 깨달음의 세계인 화엄을 쉽게 허락할 수 없다는 뜻일까.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일주문 약 1㎞를 앞두고, 거짓말처럼 안개가 사라졌다.
국보 제67호인 각황전 옆에 정말 잘생긴 홍매 한 그루가 있다. 조선시대 숙종 때 각황전을 중건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계판선사가 심은 것으로, 다른 홍매화보다 꽃 색깔이 검붉어서 흑매라고도 부른다는데, 탐매가와 출사객이 아침부터 줄지어서 연신 탄성이다. 탐매가 중에는 이 흑매를 남도 으뜸으로 치는 사람도 있지만, 사실은 이 매화가 천연기념물은 아니라는 것을 잘 모른다. 
천연기념물 화엄매는 절 뒤편 길상암으로 가는 길에 있다. 매화는 보통 접을 붙여 키우지만, 드물게 사람이나 짐승이 매실을 먹고 버린 씨앗이 싹을 틔워 자라는 경우도 있다. 화엄매는 그런 경우다.
대웅전 뒤편 오솔길에서 길상암 쪽으로 15분 정도를 걸어가면 만난다. 계곡 물소리와 대숲 바람소리를 들으며 우선 10분을 걸으면 구층암이고, 다시 구층암 마당 끝 오른쪽으로 난 장독대 길로 5분여를 걸어가면 길상암이다. 화엄사에서 위압을 느낀 그대라면, 구층암의 편안함이 반가울 것이다. 구층암은 자연을 닮은 암자. 뜰에 자라던 모과나무가 죽자 그 나무로 기둥을 세웠다는 일화는 너무 유명하지 않는가. 산 것도 죽은 것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곳. 이곳에서 할 일은 스스로를 낮춰 자연으로 돌아가는 일이 전부다.
「장성 백양사」 화엄사에서 순천완주고속도로와 88고속도로를 번갈아 타고 1시간 30분쯤 달리면 장성 백양사인데, 연분홍 고불매는 대웅전 인근 우화루(雨花樓) 옆이다. 우화루는 꽃이 비처럼 내린다는 뜻인데, 다시 말하면 꽃비집이다.
절의 이름을 옮긴 다른 천연기념물 매화와 달리, 백양사 백양매는 고불매(古佛梅)라 불리는 까닭이 있다. 왜색불교 흔적이 남아있던 1947년, 백양사는 부처님 원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자는 뜻으로 백양사 고불총림을 결성했다. 고불총림이란 옛 큰스님들이 모인 도량이라는 뜻인데, 고불(古佛)은 결국 옛 부처가 아니라 부처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자는 취지다.
고불매는 외로운 한 그루지만, 한 그루 매화나무가 경내를 가득 채울 만큼 향기가 강건했다. 아래부터 셋으로 줄기가 갈라져 뻗었는데, 은은하면서도 단단하다. 봄 백양, 가을 내장이라 불릴 만큼 봄의 사찰. 조선 선조 때 환양선사의 꿈에 나타난 하얀 양(白羊)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꿈에서 백양은 "나는 천상에서 죄를 짓고 양으로 변했는데, 이제 스님 설법을 듣고 환생하여 천국으로 가게 되었다"며 절을 했다고 한다. 전각의 낮은 담장이 한없이 겸손하다. 대웅전 뒤편의 팔정도탑과, 절 앞에 있는 쌍계루(雙溪樓)에 꼭 올라보시라. 천진암과 계곡이, 운문암과 계곡이 만나 빚어내는 풍경은 그야말로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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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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