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보이는 배가 제 보물 1홉니다” 거친 손가락 끝 <성덕수산>이라 쓰여 있는 4.99톤 미역조업 배 한척이 시야로 들어온다.

풍랑주의보가 내려진 12일 오후. 일을 나가진 못하지만 언제 들이닥칠지 모를 바다 상황을 예의주시하기 위해 오늘도 파도리 통개항을 지키고 있는 사나이.

제32회 농어촌청소년대상 충남도 어업인에 선정돼 내달 농림수산식품부장관상을 수상하는 정 준(35ㆍ소원면 파도리ㆍ사진)씨가 주인공이다.

바다가 낳고, 파도가 길러낸 고향 땅에서 미역과 전복, 다시마를 채취하는 게 어느새 그의 일상이 돼버렸다.

정종배(63), 김미화(55)씨 사이 태어난 정씨는 만리포고등학교를 졸업한 1996년 2월 자동차정비업을 위해 서울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부인 한미영(36)씨와 결혼한 뒤 2007년 다시 고향 땅을 밟은 그는 그 뒤로 한국수산벤처대학에서 벤처과정 및 경영자 과정을 수료하고 2010년엔 어업인후계자로도 선정됐다.

어릴 때부터 해태 일을 해오시던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김 일을 할까도 해봤지만 그는 미역과 전복사업에 힘을 실었다.

현재 파도리어촌계 산하 100칸(1칸 기준 2.5m×2.5m)의 전복양식장을 운영하며 5ha규모의 미역과 다시마양식을 병행하고 있는 정씨는 얼마 전 아버지 배 이름인 <성덕호>를 본 따 <성덕수산>이라는 간판도 올렸다.

“전복은 3년에 한 번 채취하는데, 한꺼번에 많은 양을 채취하다보니 이를 충당할만한 공간이 필요하더라고요.

또 바람이 불거나하면 조업을 나갈 수 없기 때문에 미리 따논 전복을 보관할만한 수족관은 필수죠”
3년이라는 출하시기와 맞물려 큰돈을 만질 수 있는 전복과는 달리 미역은 비교적 적은 돈이지만 안정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어 다시마와 함께 정씨의 주력사업으로 번창해가는 중이다.

그런 그도 오늘이 있기까지는 수많은 시행착오와 시련으로 고통 받던 때가 있었다. 그가 귀어를 한 해는 2007년 말로, 태안 앞바다가 검은 재앙으로 뒤 덮인 직후다.

“고향에 내려오자마자 6개월은 기름띠를 제거하는 데만 온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직도 그때가 생생한지 멈칫 바다를 바라보는 정씨. 닦아 도 닦아 도 잘 지워질 것 같지 않았던 검은바다는 차츰 옛 모습을 되찾아갔고, 2008년 겨울 본격적으로 양식업을 시작한 그는 주변 친지, 선ㆍ후배들과의 관계 속에서 차츰 바다사나이가 돼가는 중이다.

“부인과는 서울에서 결혼하셨다고 들었는데, 시골로 내려오는 것에 반대하진 않으시던가요?” “천만에요. 결혼초기부터 미역양식 사업에 대해 충분한 대화를 나눠왔습니다. 아직 어린 두 아들의 학업이 좀 걱정이긴 합니다만, 제가 그랬듯 이곳에서도 충분히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다부진 어조다.

객지생활에서 자동차정비업을 했던 정씨는 그때보다 몸은 더 고되지만 낯익은 고향에서의 삶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를 맑게 하는 활력소라고 칭했다.

그리고 조심스럽지만 미래의 꿈을 묻는 취재진에게 그는 흥미로운 이야길 꺼냈다. “어찌 보면 제 힘의 원천은 아내와 두 아들 녀석인데, 지금 하는 일만큼이나 저는 가정에 충실한 가장이고 싶습니다.

소박하지만 무엇보다 값진 제 꿈이죠” 다소 엉뚱한 듯 하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은 그의 눈에 바다는 광활한 그의 꿈을 이루게 하는 하나의 신기루이자, 가족의 화목을 책임질 묘약, 또 그를 도전으로 젖게 하는 신기롭고 거친 곳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도 올 여름은 참 아쉬운 시간이었다고. “비가 많이 내려서 이곳 파도리 주민들은 바지락 채취를 제대로 못했어요. 예년 같으면 한 가구 당 1천만원씩의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생활비 보증수푠데 말이죠” 이번 수상과 관련해 수상소감도 물었다.

“저를 포함해 모두 4명의 선원이 이 배를 타고 조업을 합니다. 겨울 매서운 바람과 싸우며 일을 하죠. 모든 어민들이 다 어렵고 힘들게 매일 바다를 누비며 일을 하죠.

이번 수상은 모든 파도리 어민들에게 주어진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지 제가 대표해 받았을 뿐이죠”
지난해부터 파도청년자율방범대 사무국장 일과 국제라이온스협회 356-B지구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언젠가부터 지역과 이웃에 대한 애착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고향이 아니라도 저는 지역봉사를 시작했을 겁니다. 근데 이곳이 제 고향이라서 더 좋아요. 내 부모가 살고, 내 자식들이 사는 곳에서 저는 충분히 봉사하며 지금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이제 막 뛰어든 일에 뭐 대단한 수상이냐며, 너스레를 떨던 정씨는 파도소리와 함께 온 바닷바람에 그렇게 항구로 걸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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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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