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쉬지 않고 걸어가 보셨는지요. 잠시 멈춰보세요. 분명 보이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먼 들판으로부터 다가온 당신은 내 마음을 빼앗아 갔지만 서러움, 그것을 기억하신다면 지금 아픔을 감내하고 있는지. 허허로운 웃음이 나오지 않아도 그 뜻은 당신이 알고 있듯이, 거친 광야에 내몰린 수많은 사람들, 아픔 뼛속 깊이 사무친 모든 이들에게 치유의 건강한 힘으로 다가온 당신.

이젠 모든 것 내려놓고 용서하시지요. 때론 마음속 처절한 슬픔이 드리워도 내겐 작은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데 서글픔, 그게 뭘까 생각해 보지만 적셔 봐도 목마르게 타오른 아쉬움이 남아 있는 걸 어찌하겠습니까. 먼 들판으로부터 살며시 다가온 당신 바람과 함께 살결 깊은 곳을 파고든 그대는 내 기억속의 봄입니다.

과연 그럴까 반문할지도 모르겠지만, 인류 역사 속에서 사과는 진정이어야 합니다. 한때 신두리 모래 언덕을 순백의 한지로 택하고, 바닷물은 먹물, 솔가지는 붓으로 기억하며 단숨에 마음 깊은 저 곳까지 써내려갔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자연의 위대함을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모래 언덕에 남은 작은 흔적을 지울 수 있을까. 한낮의 땡볕 언덕 위에 써내려간 글씨였지만, 이슬 내려앉으면 사라지는 현실에 사과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공부한 것만큼 이어지는 삶은 있었던가. 저 바다 파도는 어찌하여 달게 보이는걸까.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틀어짐인데, 그것을 무시하고 다가간 나에게 사과합니다. 보지 말아야 하고 말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 서투른 표현과 다정하지 못한 것에도 사과합니다. 삶의 무게에 정하지 않는다면 자유인걸까. 그것조차 인간적으로 생각하기에 사과해야겠죠. 다가온 것은 무엇이며, 돌아본 것은 무엇인가. 쉽지 않은 세상살이지만 기억하면 삶은 고귀한 것인데, 책상 앞에서 곰곰이 기억해 본 것은 내 삶은 그래도 아름다운 춤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 춤판 아직도 이렇게 이어지고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기린(麟)이 드넓은 초원에서 한가로이 거닐고, 봉황(鳳)이 여의주를 물고 하늘을 날아오를 때, 거북(龜)은 두 눈 껌벅이며 묵묵히 바다를 호령했습니다. 또한 용(龍)이 자기 몸을 틀어 승천하려 울어제낄 때, 천 년 동안 고고하게 살았던 학(鶴)이 말했습니다. 기린은 목이 길어 슬펐으며, 용은 승천하지 못한 이무기고, 봉황은 상상의 새이니 날지 못하는 것은 당연함이요, 거북은 땅과 바다에서 살고 있으니 어찌 하늘의 심오한 뜻을 알겠는가.

천하의 맹수라는 호랑이도 알려진 바 아직은 사자와 결투에서 누가 이겼다는 검증된 사실이 없으니,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의 두뇌를 어찌 이길 수 있을까요. 천 년 동안 살았다는 학도 따지고 보면 우리 가슴속에만 있는 것이지 볼 수는 없는 겁니다. 봄비 내리면 대밭에는 죽순이 봉긋 솟아나는데, 현실에서는 천 년의 학, 용, 봉황, 거북, 기린도 오래도록 살아간다는 의미 말고는 아무런 근거도 없고, 죽순보다 못하다는 제 생각이 앞질러 나간 걸까요.

아무리 참으려 해도 몸이 아프면 현대의학이 먼저인데, 그것을 간과하고 인정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내 부주의로 발목을 다치고 그로인해 일 년 가까이 고생하다보니 이런 생각도 드는 건 나이가 있음에도 철없음이죠.

매화는 삼월에 핀다고 했습니다. 꼭 그럴까요. 꽃은 제철이 올 때까지 조바심을 내지 않는 거죠. 하지만 성급한 마음으로 삼월을 맞았는데 봄을 별로 타지 않는 체질임에도 지난 겨울이 정말 추웠던 까닭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래서 꽃도 아니고 사람인 거죠. 긴소매 차림으로 산을 오르던 이들도 이젠 대부분 짧은 옷을 가까이 하려는 것을 보면 그래도 봄입니다.

지난 주말에 청주에서 지인 몇 분이 오셔서 바닷가에 들었다가 생선 안주로 술잔이 몇 순배 돌았는데 상대에게 술을 따를 땐 ‘제가 한 잔 따를까요’ 윗사람이라서 그런지 ‘제가 한 번 해볼께요’ 하면서 소주잔을 채워주더군요. 문장의 단락에서 행간에는 없던 말이지만 이렇게 신선할 수가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과연 우린 그동안 술을 입으로만 먹었지 가슴과 소통하는 술을 마셨던가? 그야말로 제대로 술값을 한 것이지요. 고리타분(?)한 유학(儒學·孔孟學)을 오늘의 살맛나는 언어로 되살려내는 그 분의 내공으로 인하여 난해한 문집과 경전 안에 숨어있던 묵직한 문자(文字)를 조리질해 내 속으로 끌어내린 수고로움이 빛나 보였는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는지.

제 공부 중에 홍도(弘道·도를 넓히다)라는 두 글자는 오랜 세월 동안 미리 한쪽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전공(專攻)이라는 이유로 당송(唐宋)시대 선사(禪師)들에 대한 일방적인 짝사랑은 급기야 모든 그럴듯한 언어는 선어록(禪語錄)에 실려 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하는 버릇이 생겼던 거죠. 따지고 보면 그게 큰 서두름인데 그걸 찾다가 포기한 ‘사람이 도를 넓혀갑니다’의 출전은 선어록이 아닌 ‘논어’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공자 말씀인거죠.

사실 소화된 언어란 영역의 구애를 받지 않습니다. 설사 남의 말이라고 할지라도 제대로 소화시켜 자기의 언어로 만든다면 그건 말이 되는 거죠. 그리고 무엇이건 비교를 통해 내 것을 제대로 알게 되는 법입니다. 빌 게이츠도 “하늘 아래 정말 새것은 없다. 단지 새로운 조합만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로서 힘을 더해 주는데, 이제 자리를 박차고 달려가 잠겨 있던 홍도문(弘道門)을 힘껏 밀친다면 곧바로 열릴 것 같습니다.

긴 의심이 풀린 기쁨에 서재 한켠에 펼쳐져있는 한지 위에 붓에 먹물을 적셔 ‘홍도(弘道)’라는 글자의 앞뒤에 붙어 있는 여덟 글자를 주문(呪文)처럼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써내렸습니다. 서툰 목수는 언제나 일한 티를 내기 마련이듯 그 와중에 튄 먹물 두 방울이 내 흰 와이셔츠 소맷자락에 훈장처럼 사이좋게 매달려 있더군요. 인능홍도(人能弘道)요 비도홍인(非道弘人)이라, 사람이 길을 넓히는 것이지 길이 사람을 넓힐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언어의 쉼표 ‘제가 한 번 해볼까요’ 그 말 정말 신선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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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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