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0년 4월 수운 최제우 선생이 동학을 민족종교로 창시한 이래 동학은 당시 고통받아 온 농민들에게 ‘제폭구민(除暴救民)’이라는 희망을 주며 폭넓게 수용되었다. 당시 농민은 피지배층으로서 오로지 국가의 수단적 지위에만 머물렀던 계층이었으나 드디어 평등을 꿈꾸며 인간 존중의 세상을 만드는 주체적 존재임을 의식하는 단계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농민의 지위 향상을 넘어서 농민 스스로 자각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실천으로까지 발전시킨 매우 의미 있고 가치 있는 활동으로 역사적 평가를 받았다.

1894년 2월 15일 고부에서 시작된 농민혁명은 4월 5일 전북 고부 무장을 거쳐 5월 11일 황토현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6월 6일 중앙정부가 동학농민군의 요구 조건을 들어주겠다고 회유해 맺은 전주화약 결과 ‘폐정개혁’을 요구하며 농민 자치기구인 ‘집강소’를 전라도 지역 53곳에 설치하게 되었다. 농민 스스로 자치기구를 운영할 수 있는 단계로 성장한 것이다. 외세의 침략과 부패한 봉건 제도에 항거하여 일어난 동학농민군은 이후 우세한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무참히 패배한 이후 그 당사자는 물론이고 유가족이 당해야 했던 고통과 희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정이었다.

2019년 문화체육관광부는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로 제정하였다. 황토현전투의 대승을 국가기념일로 정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으며, ‘동학’과 ‘동학농민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 또한 순탄하지 않았다. 사실 동학농민군 활동은 처음부터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필자의 중학교 시절은 우리 역사학계가 식민사학(植民史學)의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때이었기에 역사 교과서에서는 ‘동학난’으로 기술되었다. 1980년대 대학에 들어가 사학도로서 공부할 때 드디어 민중의 주체적인 역사가 역사 연구자에 의해 주목받기 시작하여 ‘동학농민운동’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이후 ‘반외세(反外勢)·반봉건(反封建)’을 내세우며 농민의 자각과 주체적인 의식과 활동에 대한 의미와 가치가 재평가되어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용어로 정립되었다. 그리고 ‘동학의 시대정신’, ‘동학농민군 활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와 가치가 재조명되어 드디어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다.

‘동학 정신’은 실패한 미완의 혁명으로 끝나지 않았고 동학농민혁명 이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한 축을 이루었으며 ‘동학 정신’이 품고 있는 ‘인간 존중 사상’은 곧 민주주의의 이념으로 계승되어 그 의미와 가치가 재조명되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고장 태안은 동학농민혁명 최초 ‘북접 기포지’이며 ‘백화산과 토성산, 목네미샘 참극’ 등 최후 피해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그 후손들 사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유족이라는 관계를 넘어서 상생과 협력의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동학 기록물과 유물’, ‘동학 관련 문화사업’ 등 동학 문화유산이 계승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태안군유족회’를 비롯하여 ‘동학농민혁명태안군기념사업회’ 등 동학 단체를 중심으로 ‘태안지역 동학’과 ‘내포 지역 동학’에 대한 묻혀진 사실을 제대로 알리고 연구하며 공유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그 중 ‘동학농민혁명 국가기념일’ 제정 이후 두 해를 맞이하여 백화산 기슭 ‘갑오동학혁명군추모비’ 앞쪽에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 드디어 7월 개관을 준비하고 있다. 태안군청의 협조로 기념관이 세워질 수 있는 것은 대단한 결실이며 태안지역 동학 정신을 알리는 큰 계기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태안의 문화유산으로써, 문화공간으로써 큰 기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그간의 ‘태안 동학’을 알리는 집합체이며 ‘동학의 정신이 태안의 정신’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활동이 현실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이제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더 이상 과거의 핍박받고 고통받는 아픈 역사의 장소가 아니라 태안의 미래를 계승하는 희망의 공간이자 미래 세대에게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교육의 장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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