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여덟이라는 수는 동양권에서는 흔히 부족함 없이 꽉 찬 상태를 이르는데 사용됩니다. 모든 것을 아우르는 절대 경계를 뜻하는 것이죠.

사람의 온 평생은 팔자(八字)로 결정됩니다. 조선 팔도(八道)가 팔방(八方)으로 뚫려 팔달(八達)이며, 팔방미인을 좇아 팔(八)난봉이 나대는데, 결국 팔고(八苦)를 겪다가 팔열(八熱) 팔한(八寒) 지옥으로 떨어집니다. 팔만(八萬) 대장경을 다 외고 팔괘(八卦)를 훤히 꿰어도 팔덕(八德)이 없으면 팔불출(八不出)을 못 면하는 것입니다.

글로 하면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를 치지만 음중팔선(飮中八仙)의 경지까지 갖춘 이태백에게는 그 누가 비기겠습니까. 글씨도 팔체(八體)를 두루 익혀야 팔면영롱(八面玲瓏)이 됩니다. 세상에 맛있는 음식은 팔진(八珍)이요. 병을 낫게 하는 천하의 약초는 팔초(八草)로 꼽습니다. 죄를 지어 팔형(八刑)을 앞에 두었어도 여덟 가지 조건을 갖추면 팔의(八議)에 들어 형이 깎입니다.

이렇듯 팔자로 감친 명구가절(名句佳節)을 헤아리기란 저 팔준(八俊)의 팔수(八手)를 동원해도 미처 모자랍니다. 어쨌건 무릇 팔자는 원만구족(圓滿具足)과 풍웅고화(豊雄高華)의 덜목을 지닌 글자임을 거듭 알겠습니다.

아시겠지만 ‘팔경(八景)’ 이란 게 있습니다. 사뭇 좋은 경치를 선현들은 여덟 가지 풍치로 나누어 상찬했습니다. 우리의 귀에 익은 관동팔경(關東八景)이니 금강팔경(金剛八景)이니 하는 말들이 그것입니다.

팔경이라는 일컬음은 중국 송(宋)나라 때 소상팔경(瀟湘八景)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소상은 중국 양자강 남쪽을 흐르는 소수(瀟水)와 상강(湘江)을 가르키는 것으로 이 두 줄기가 서로 만나는 계곡에 천하절경으로 빚어진 거죠. 북송(北宋)의 화가 송적(宋迪)은 이 만다라에 반해 사철 밤낮없이 소상 주변을 누비며 붓을 쳤습니다. 그리하여 철 따라 염려(艶麗)한 소상 풍경 8폭을 건졌는데, 바로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입니다. 그 팔경에는 낱낱이 화제를 붙여 생동하는 숨결을 불어 넣었습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①산시청람(山市晴嵐) 온 산 가득 맑은 이내 ②연사모종(煙寺暮鐘) 안개 낀 절 집의 저녁 쇠북소리 ③원포귀범(遠浦歸帆) 먼 포구로 돌아오는 돛단배 ④어촌석조(漁村夕照) 갯마을 비끼는 석양 노을 ⑤소상야우(瀟湘夜雨) 온 강에 쏟아지는 밤비소리 ⑥동정추월(洞庭秋月) 동정호에 비치는 가을달 ⑦평사낙안(平沙落雁) 백사장에 내려와 앉은 기러기 떼 ⑧강천모설(江天暮雪) 저무는 강변에 내리는 눈

이 팔경의 묘사가 어찌나 청신하고 그윽했던지 이후 한다하는 소인묵객(騷人墨客)들은 팔경음(八景吟)으로 숫제 서로의 손속을 겨루기 버릇했습니다. 소상팔경의 의취는 그야말로 시가 그림이고(詩中畵) 그림이 시(畵中時)인 경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할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그 풍조는 일찍부터 전해져서 조선 팔도 곳곳의 빼어난 경치마다 팔경의 찬송이 난무했습니다. 그 기세는 고려를 거쳐 조선조까지 자못 등등하여 이른바 가사문학의 힘찬 개화에도 한 몫 했습니다. 예를 들어 고려 때 명창 쌍명재 이인로(雙明齋 李仁老)는 「송적팔경도」를 직접 만들어 불렀습니다. 여섯절경인 <소상야우>를 읊어 보겠습니다.

일대창파양안추(一帶滄波兩岸秋) 푸른 강 언덕엔 어느덧 가을·풍취세우쇄귀선(風吹細雨灑歸船) 보슬비 맞으며 돌아가는 배·야래박근강변죽(夜來泊近江邊竹) 물가 대밭에 배를 매자니·엽엽한성총시수(葉葉寒聲總是愁) 잎잎이 으스스 시름뿐이네

세월이 흘러내려 조선조 가사에는 <관동팔경>과 <관서팔경>이 아릿다이 얽혀 있습니다. 그 차림만을 살펴보더라도 간성 청간정(杆成 淸澗亭)·강릉 경포대(江凌 鏡浦臺)·고성 삼일포(高成 三日浦)·삼척 죽서루(三陟 竹西樓)·양양 낙산사(襄陽 洛山寺)·울진 망양정(蔚珍 望洋亭)·통천 총석정(通川 叢石定)·평해 월송정(平海 越松亭)입니다.

태안 지역에도 손꼽을 만한 풍경이 있어 태안군에서 태안팔경(泰安八景)으로 지정하였는데, 한글로 된 팔경을 그대로 올리고 제가 한자로 시문하여 상재 하겠습니다.

태안군에서는 지정한 팔경은, 1,백화산 2,안흥성 3,안면송림 4,만리포 5,신두사구 6,가의도 7,몽산해변 8,할미·할아비바위 입니다.(안흥성은 ‘안흥진성’으로, 신두사구는 ‘신두리 모래언덕’으로 바뀌어야 하는데, 요원 합니다)

①백화마애(白華磨崖) 신령스런 백화산 마애삼존불 ②안흥성석(安興城石) 바다를 지키려 쌓은 수 많은 섬돌 ③안면송림(安眠松林) 끝없이 이어지는 안면도 솔숲 ④만포백사(萬浦白沙) 희고도 고운 만리포 모래장벌 ⑤신두사구(薪斗沙丘) 금빛 찬란한 신두리 모래언덕 ⑥가의귀범(賈誼歸帆) 가의도에 돌아오는 만선의 어부 ⑦몽산해변(夢山海邊) 꿈에서 찾은 몽산포 십리 해변 ⑧꽃지낙조(花池落照) 할미·할아비바위 너머 석양빛.

초장부터 딱딱한 글로 마음이 불편하진 않으셨는지 모르지만, 겨울빛 아직 남아 스산한데, 마지막 겨울 보름날이 떠올랐습니다. 아침부터 진눈개비 흩날리고 떨어진 낙엽 처절하게 뭉개져 이 겨울은 부셔져 버리고, 겨울 찬바람 살결에 와 닿는데, 한겨울의 혹독함보다 코로나19가 더 혹독할지도 모르지만 현실속에서 마음은 비어지고 사람들은 서서히 지쳐가는 이 순간, 전염병보다 사람이 무서운 건 왜일까요. 언젠가는 아픔도 물러가겠지만 그 때가 언제일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도 옷깃을 여밀 수 없는 순간들, 겨울 스산한데 마지막 겨울 보름달이 떠 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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