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보다 더 젊은이여 낭만을 절대 잃지 마시게. 메마른 사막이 아름다운건 그 속에 푸르른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라네. 고달프고 허기진 삶의 연속이 괴롭힌다해도 천천히 기억해보면 그곳엔 끝이 보이는거지. 살다보면 청춘은 가냘프게 야위어 가지만, 결코 세월을 원망하거나 깊다고 말하지 마시게. 낭만, 그것은 생각처럼 쉽진 않지만 젊은 그대는 섣불리 쫓아가지 말고 얼마나 내가 나를 사랑하고 사는지 기억하시게.

긍정의 수레바퀴는 언제나 활기차게 돌아간건데 하지만, 자신이 수용할 수 있는건지 생각해야지. ‘나 너 아닌 우리’ 로 살아가는 정신이라면 우리에겐 그나마 무한한 결정의 희망이 있는건데, 젊은이여 절대 낭만을 포기하지 마시게. 지금의 아픔은 아픈 것이 아니라네. 자네, 내 나이만큼 살아보셨는가. 그것도 진정으로, 나보다 더 젊은 친구여 이쯤에서 웃어야지. 성냄을 버리시게 버리지 않는다면 어찌할건가. 그럼 그럼 그래야지 그래야 낭만이지. 이다음 더 늙어서 낭만에 대하여 이야기해보세.

 

저마다의 가슴에 피어나는 자연의 경이로움, 이름모를 작은 들꽃에도 사연이 있겠지만 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혀도 의연하게 일어서는 이름모를 작은 풀 한 포기가 눈에 들어옵니다. 삶은 고단해도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듯, 하여 그 한가지는 희망입니다. 그럼에도 우린 지금 스마트폰 의존 때문에 인류의 지능은 계속 하락중인데, 기계는 똘똘해지고 인간은 어벙벙해지는 것을 어찌할건가요.

저는 생뚱맞지만 구석이 좋습니다. 왜냐면 오롯이 혼자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순간 꽃나비와 사랑에 빠진들 누가 감히 탓하겠습니까만, 이쯤에서 인정해줘야 하는데 정말 아쉬움입니다. ‘해들누리’ 제가 좋아하는 문장인데 ‘햇살 가득한 세상’ 그런 자유의 세상은 언제이련지. 하지만 비바람 없이 무지개가 있던가요. 무지개는 하늘의 눈물이라는 것을 알고 계시는지.

책 한 권 읽지 않으면서 손가락 하나로 터치해서 모든 정보를 뒤흔드는 세상, 과연 감성이 내재될까요. 급변하는 세상에 용이하기도 하겠으나 그렇다해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생각의 깊이는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뇌를 굴리는 관점에서 본다면 기계의 힘보다는 아날로그의 감성이 더 나을텐데 왜 우리는 그저 쉽게만 가려고 하는지 그게 궁금합니다.

제가 서예공부를 하는 입장이라면 그렇고, 혹자는 ‘옛 이야기 하시네’ 그렇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조형을 이끄는 입장에서 보면 이건 아니잖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제가 구차하게 스마트폰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온 국민(?)이 그것에 빠져 있는걸 보면서 안타깝게 보는 관점입니다. 고개숙여 책 한 페이지 읽기보단 스마트폰에서 무슨 정보를 취하려는지. ‘왜 우리는 조급한가’입니다. 느림의 미학을 차치하고서라도 너무 서두르는 건 아닌지. 그렇습니다. 말로는 천천히 그러면서도 행동은 그렇지 못한건데 못말리는 습성인거죠. 그래 그래 인정 하면서도 ‘왜’ 라는 단어를 기억해봅니다. 조급함 ‘시작과 끝은 하나의 동사인데’ 그거 이해하시는지.

벽을 가득 매운 책장 사이로 벽난로 속 장작이 타다닥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타 들어가고, 안락한 흔들 의자에 기대 읽고 싶은 책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그곳, 바로 많은 이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서재의 모습인데 나는 그것을 갖추었으니 행복한걸까? 그러나 이상은 포화 상태가 된 책장 옆으로 뽀얀 먼지와 함께 책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순간 참혹한 현실이 됩니다.

서재를 넘어 집을 서서히 잠식해가는 책은, 더 이상 행복이 아닌 괴로움이며,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책을 수집한 나로서는 이쯤에서 책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는데, 책의 무게를 견디다 못한 집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책 다이어트를 고려해야겠습니다.

책이 아무리 많더라도 책장에 꽂아두는 한 언제든 검색할 수 있는 듬직한 ‘지적 조력자’ 입니다만, 그럼에도 책장에서 비어져 나와 바닥에 쌓이는 이 순간은 융통성 없는 ‘방해꾼’ 이 아니던가요. 그러다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까지 와 범람은 결국 ‘재해’로 치닫고 있습니다. 책으로 인해 인간다운 삶마저 위협받는 지경인데, 사실 필요한 책은 곧바로 손에 닿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눈에 잘 보이도록 놓되 상자에 담아 보관해서는 안 되는 것은 철칙이지만, 책의 양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다다랐으니 일말의 망설임 없이 헌책시장이라도 열어 처분해야 하는건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더 큰 책장을 사고, 더 넓은 집으로 이사를 가는 방법은 근복적 해결책이 아닌, 임시방편인 셈인데 독서법의 변화도 필요함을 느끼지만, 같은 분야를 다룬 여러 권의 책을 읽는대신, 꼭 필요한 책 한권만을 숙독해야겠습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과연 이상적인 장서의 양은 어느 정도일까. 각자 생각은 다르겠지만 500권 정도가 가장 적당할 것입니다. 장서치고는 너무 적은 것일까? 사실 책 500권이란 칠칠치 못하다거나 공부가 부족하다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어지간한 금욕과 단념이 없으면 실천하기 어려운 일인데, 이를 실행하려면 보통 정신력으로는 안되는거죠.

십수 년 전 서예학원을 운영하면서 늘어난 책을 감당하지 못한것도 있지만, 동생과 아들이 공부했던 태안고에 책 기증 의사를 밝혔더니 조아무개 교장 선생님께서 종교적 색채가 있는 것은 제외해 달라는 조금은 황당했지만, 마음먹은 것이어서 2천권을 기증했습니다. 그리하고도 지금 또 다이어트를 생각중인데, 아들이 걸리는 건 ‘아버지가 읽고 공부했던 책은 저에게 물려주세요. 의미가 있지 않나요’ 했던 기억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루에 세 권쯤 책을 읽으면 독서가라고 말하는 듯하나, 실은 세 번, 네 번 반복해 읽을 수 있는 책을 한 권이라도 더 가진 사람이야말로 올바른 독서가가 아닐까 생각해보는데 동의하실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이 괴로움이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전자책이 빠르게 대중화 되고 있는 지금 시대에 뒤쳐진 걱정이라고 치부할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책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오히려 지적 생산의 유통이 정제된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좋아도 읽지 않는 책이 한낱 종이뭉치에 불과한 것처럼 찾을 수도, 읽을 수도 없는 책은 그저 짐일 뿐인거죠.

마키아벨리의 아버지가 평생 수집한 책이 40권이라는 사실에 굳이 비추어 보지 않아도, 우리는 책과 정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는데, 마음만 먹는다면 수백, 수천 권의 책을 손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정도입니다. 소장한 책은 언젠가는 다시 읽게 되리라는 막역한 다짐과 함께 오늘도 구석에 쌓여가는 책들을 뒤돌아보게 하는, 그러나 생각한 건 ‘소유’ 가 아닌 ‘내려놓음’ 의 지혜를 이제야 알았다는 것입니다. 도서관에 앉아서 책을 읽는다고 똑똑해지는 건 아니기에... 그럼에도 나는 내일 다시 서점에 갈겁니다. 지식이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런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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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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