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수(53ㆍ태안읍 어은1리 산38)ㆍ전재옥(50ㆍ사진 왼쪽) 부부가 집 앞 테라스에서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다.
장동수(53ㆍ태안읍 어은1리 산38)ㆍ전재옥(50ㆍ사진 왼쪽) 부부가 집 앞 테라스에서 카메라를 향해 활짝 웃고 있다.

“정말이지, 농사가 이렇게 힘든 줄 알았다면 귀촌하진 않았을 거예요. 밭둑서 울기도 얼마나 울었다고요...”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이육사의 ‘광야’ 중>

지금이야 농사를 짓는 게 숙달이 돼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산다지만, 처음 태안 땅을 밟고 농사일을 배울 때만 해도 전재옥(50ㆍ사진 왼쪽)(사)한국여성농업인태안군연합회장에게 태안은 그야말로 시 광야의 배경에 나온 원시시대에 불과했다고.

그저 남편인 장동수(53ㆍ태안읍 어은1리 산38ㆍ태안농협이사ㆍ사진 오른쪽) 어은1리 직전 이장의 뜻에 따라 시골로 내려오긴 했지만 나무에서 자라는 줄만 알았던 쌀이며 고구마는 땅 속 깊은 곳에 파묻혀 있었고, 수산시장에 가면 늘 살 수 있던 생선들도 고귀한 땀의 대가라는 사실에 혀를 내둘리기 바빴다.

그도 그럴 것이 도시처녀 생전 처음 온 시골생활 어디 낯설지 않을 수 있으랴. 그래선지 당시를 회상하면 젊은 시절 전씨는 농사일에 찌들어 항상 입이 댓발은 나온 모습이었다.

남편 장씨를 만나 결혼해 귀촌에 이르기까지 이들 부부의 알콩달콩 시골로맨스가 궁금해진다.

행복을 꿈꾸는 집. 희망이 노래하는 다육식물들. 빗장을 열면 곧 조선시대 궁궐에 이를 것 같은 신발장하며 천장을 높게 달아 다락방으로 향하는 발길, 눈길이 마치 따스하지만 매서운 추위를 느끼게 하는 가을향내처럼 진솔하게 집안 곳곳에 풍긴다.

지난 25일 귀촌 20년차에 접어드는 장씨 부부를 만나기 위해 핸들을 돌린 것은 부부의 살림집이 있는 태안읍 어은1리 산골마을이었다.

낯선 이의 차가 농로 허리를 꺾어 집에 다다르니 개들이 여기저기서 짖기 시작한다. 백화산맥이 이어지는 오석산 산자락 중간에 자리한 장씨 부부의 집은 배추농사를 짓는 여러 채의 하우스 사이 높고 아담하게 놓여있었다.

 
 
태안을 이끌고 있는 여성농업경영인회장의 집이라면 좀 부산한건 아무래도 좋다.

따뜻한 대추차를 내와 남편 장씨와 셋이 도란도란 옛 추억들을 곱씹기 시작했다.

장씨 부부의 일 년은 크게 이렇다.

6월 말부터 7월말까지 6쪽마늘을 수확해 판매하면, 7월에서 8, 9월 사이에는 건고추를 거둔다. 이어 10월 중순에서 11월 초까지는 호박고구마를, 11월 14일 이후부터 12월까지는 장씨 부부 가계의 가장 큰 수입원인 절임배추가 출하시기를 맞는다.

지난해에는 성에가 심해 수확은 엄두도 못 냈지만 장씨 부부는 평상시 겨울나기 작목으로 감태를 꼽는다. 올해는 지난해 몫까지 더 열심히 감태사업에 열을 올릴 참이다.

이렇게 바쁘게 농사를 짓다보니 여가는 꿈도 못 꿀일. 혹여 부부가 가입된 사회단체나 모임에 행사가 있을 때면, 그 전날은 꼬박 이틀 치 양의 일을 해놔야 일정을 소화할 수 있을 정도라니 얼마나 바쁘게 사는지 감이 온다.

장씨 부부가 이곳에 둥지를 튼 건 순전히 장씨의 고향이 이곳이기 때문이었다. 부모님과 조부모님을 모시기 위해 2남 4녀 중 차남인 장씨가 부인 전씨와 1년여의 고심 끝에 고향에 내려오게 됐다.

우스갯소리지만 내려올 당시만 해도 장씨는 조부님이 101살까지 사실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당시엔 4대가 이곳에 살았어요. 지금도 아랫마을에 아버님, 어머님이 살아 계시지만, 조부모님과 우리 아이들까지 해서 태안군에서도 4대 가족이 사는 건 드물었죠. 참 지금 생각해보면 80이 넘으신 조부님만이라도 생전까지 모시고 다시 올라 오자 했는데. 100세가 넘으실 때까지 안 돌아가시더라고요.(허허허)”

1년, 2년, 3년. 잠깐이면 될 줄 알았던 시골생활이 4년 전 조부님이 돌아가시기까지로 해  올해로 20년차에 접어든다. 지극정성. 어쩌면 이것이 부부의 천직이자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농사일처럼 말이다.

부부는 자신들을 맞벌이부부라고 칭했다.

“출근을 할 때면 화장도 곱게 하고 옷도 단정하게 입고 나가요. 여느 회사원들처럼 말이죠. 시골 어르신들보면 기미에 잡티에 새까맣게 그을린 모습이 그렇게 미워 보일 수 없더라고요.”

전씨가 말하는 일터는 고구마밭과 배추밭이다. 이렇게나마 자신을 관리하고 시간을 철저하게 쓰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늘의 보람과 마주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부부는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에만큼은 엄격하다. 자칫 나태해질 수 있는 농사일에 서로에 대한 격려와 진심어린 배려가 이 부부의 철칙인 셈이다.

그리고 전씨의 또 하나 일과는 바로 영농일지.

“가계부는 안 써도 영농일지는 매일 꼬박꼬박 써요.”
‘농업은 경영이다’란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가히 여성농업경영인회장다운 멋짐이다. 전씨는 ‘때에 따라 파종을 하고 물을 주고, 병충해 방지에 노력을 기울이고’에 대한 전 과정을 일지로 기록하고 있다.

음력으로 기록하다보니 태풍이나 폭우같은 천재지변만 아니면 대부분이 작년처럼 시기가 이어져 온단다.
이쯤 되니 군내 원조 격인 부부가 운영하는 오석산영농조합법인의 절임배추사업 얘기가 듣고 싶어진다.

절임배추는 장씨가 어머님이 매년 하던 김장김치 제조방법에 착안해 고안한 사업이다. 태안의 지리적 특성상 절임배추사업은 꽤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도 강했다.

그렇게 배추를 심고 바닷물로 절여 수원시청과 안양시청에 다니는 여동생들과 동료 공무원들에게 소규모로 배추를 내다팔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장씨의 1톤 화물차량만큼의 분량에 미치던 것이 해를 거듭할수록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2004년 KBS 6시내고향이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3년 연속 장씨 부부의 감태와 절임배추가 공중파를 탔고 이내 절임배추의 유명세는 전국을 강타했다.

전국에서 밀려드는 주문량을 맞추기 위해 우체국과도 택배계약을 이쯤 성사시켰다.
장씨 부부는 절임배추사업의 대박기운 중 하나는 오석산의 영험함이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밭이 있고 산이 있는 이곳에 2009년 집을 지었다.

현재 장씨 부부가 일용직근로자를 사들여 농작하는 땅은 하우스만 2645m²(800평)에, 밭이 33058m²(1만평)이다. 계절별로 연간 절임배추가 1800포기, 고추가 1600근 가량 생산ㆍ판매되고 있는데 올해는 작황이 좋아 정부수매가도 낮고, 농산물가격이 바닥을 치고 있어 어려움이 크다고.

“농부의 아내가 된 게 제 길이죠. 또 저도 농사를 짓는 사람이 됐고요. 이런게 운명인 것 같아요.”

대학에서 유아교육을 전공한 전씨는 “어쩌면 지금쯤 유치원원장이 돼 있을지 않았을까”라며 자신에게 처한 일과 운명을 마치 숙명처럼 거스르지 않았다.

“처음 농사일을 배울 땐 밭둑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그만큼 농사일이 제겐 벅차고 힘들기만 하더라고요.”

지금도 힘든 하루해를 정리할 때면 가끔은 서산시내에 나가 사우나도 하고 설렁탕도 한 그릇씩 먹고 들어온다는 장씨 부부. ‘아, 이게 생활이고 삶이다’를 일깨워준 장씨 부부의 소원은 대학에 다니는 아들, 딸이 건강히 사회에 나가는 것과 부부의 건강이다.

“나이 먹으면 아무리 잘난 사람도 별스럽지 않더라고요. 그저 우리 부부 건강하게 지내면 그 뿐이죠. 혹여 큰 병이라도 올까 그게 제일 불안하죠.”

장씨의 눈동자는 매우 또렷하고 선명했다.

“아내에겐 늘 미안한 마음뿐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생각해보니 처음 시골로 내려왔을땐 저야 뭐 읍내에 나가 후배들, 선배들 만나 술 마시고 얘기라도 할 수 있었지만 어디 아내는 그랬겠습니까? 세상천지 아는 사람 한명 없는 낯선 시골에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저뿐이었겠죠.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여보, 우리 남은 여생 행복하게 살아요~.”

가족이라는 테두리로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이제 쉰을 넘기고 있는 부부의 아름다운 노년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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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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