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이환(경동설비)
지이환(경동설비)
봉사란 게 사실 하다보면 지치기도하고 생색내려 시작한 건 아니지만 가끔은 받는 걸 너무 당연시 여기는 사람들에게 질려 혀를 내두르는 날도 많다.

더운 날은 더운 대로, 추운 날은 추운 대로 그렇게 봉사하길 올해로 꼬박 18년째다.

언젠가는 누군가를 도울 수 있을 날이 올 거라 생각했지만 막상 ‘봉사’라는 말로 치장해 버리자니 진정으로 한 봉사가 아닌 것 같아 양 볼이 붉게 달아오른다.

“봉사랄 게 있나유. 그냥 생활이쥬 뭐”

이말 외엔 별다른 말이 없다.

지난 9일 찌는 듯 한 무더위가 살 속을 통과하는 더운 날. 그의 일터에서 오늘의 주인공 지이환(42ㆍ태안읍 남문리ㆍ경동설비ㆍ사진)씨와 아내 서혜숙(40)씨를 만났다.

이제는 밥 먹는 것처럼 생활이 됐다는 그의 봉사는 이젠 유별날 것도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하나의 습관이 됐다고.

이환씨의 봉사이력은 실로 대단했는데, 그가 성년이 되던 스무 살 때부터였던 것 같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땐 지금보다도 생활이 더 어려웠단다. 이환씨는 아버지 지동기(77)씨와 어머니 박정열(68) 여사 사이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지금도 소원면 의항리에서 농사일로 하루를 시작하시는 부모님 곁에서, 자신이 나고 자란 태안에서 남을 도울 수 있다는 게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

이환씨는 보일러부터 건설현장까지 누비는 그야말로 다재다능 재주꾼이다. 남들은 그의 손길이 닿은 자리엔 기적처럼 기계가 돌아가고 도로가 제 모습을 갖추게 돼 기쁘다고들 하지만 실제 그의 봉사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추운 겨울 홀로 지내는 이름 모를 노인에게 화목보일러를 놔주고 어렵게 사는 아이들에게는 도배와 장판을 새로 깔아 주는 등 그의 봉사는 경계도 계층도 불문한다.

그랬던 그가 본격적으로 기술을 익히고 봉사를 시작한 건 아내 혜숙씨를 만나고 부터다.
부부는 닮는다고 했던가. 웃는 얼굴이 꼬옥 빼닮은 두 젊은 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악착같이 남을 돕고 있다.

그래서 살았던 전세방을 버리고 일터 작은 방에서 아들 둘과 네 식구가 지내다가 또 조금 형편이 나아지면 월세라도 얻어 살다 또 가게 단칸방에서 지내길 어언 17년. 사춘기 두 아들들의 눈치도 볼 법 하건만 이환씨의 신념에는 굳은 무언가가 단단히 박혀 있는 모양이다.

일 년에 500만원은 태안읍을 통해 사회복지공동모금회로 성금을 기탁한다. 또 크고 작게 남의 집을 수리해주거나 보일러 등을 놔주는 일은 수두룩하다.

이제는 그에게 보답 받은 노인들이 시내에 들를라치면 그의 가게에서 음료수를 얻어 마시고 쉬다가는 일도 다반사.

아들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이환씨는 자신감에 찬 어조로 말했다.

“올해부터는 중학교 2학년인 큰 아들 녀석이 함께 봉사현장을 찾아 일을 하고 있슈. 자식들은 제 부모를 우상으로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래유. 지가 뭐 링컨이나 이런 큰 위인은 아니지만 늘 노력하고 봉사하는 아빠로 남아야 한다는 것만은 분명하고만유. 이런 제 뜻을 아내도 잘 알고 따라 주고 있고유.”

봉사 그거, 별것 아니다. 마음이 움직이고 손이 가면 그만인 것을.

돈, 그거 있다가도 없으면 그만이다. 없으면 벌면 되고, 벌면 나누면 되는 것이다.

이환씨의 하루는 정직한 땀에서 훈훈한 미소로 마무리된다.

“언젠가 아들들에게도 말했슈. 스무 살 이후까지만 아빠를 믿어 달라고유. 아니 아빠라기보다 지들보다 인생선배로서 말했슈. 니들이 성인이 되면 그땐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그 전까진 아빨 따라 달라고유.”

세상에 정직하지 않는 것은 모두 허상이라고 믿는 그가 딱 한번 친구와 함께 재미삼아 로또를 사봤다는데. 결국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특별히 좌우명이랄 것까지야 있남유. 정직하고 거짓말안하고 사는거쥬. 그러면 더 좋은 날이 올꺼예유.(웃음)”

1997년 아내를 만나고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을 시기 다니던 직장에서 명예퇴직을 당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뒤 일주일이 지난 어느날이었다.

서울 생활을 과감히 접고 이듬해 고향 땅에서 9년간 한 직장에 다니며 설비 일을 배웠다. 몸으로 익힌 기술 덕에 자그마한 가게를 냈고, 알콩달콩 부부에게는 건강하고 착한 두 아들이 태어났다. 그리고 건설 유지보수 일까지 맡게돼 이환씨는 요즘 더없이 바쁜 나날을 보낸다.

“국민학교때였을꺼예유. 임산부에게 자리를 양보했는데 그때 그게 얼마나 뿌듯했는지 몰라유. 그때 ‘아 남을 돕는 게 이런 거구나’를 생각했었쥬.”

봉사는 주관이고 소신이다. 그의 생각은 하루벌이 10만원이라도 저녁에 가족과 모두 둘러 앉아 밥을 먹고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면 그걸로 족하다고 했다.

“아버님이 절 위해 살았고 이제 제가 두 아들을 위해 삽니다. 훗날 제 자식들도 자신들이 낳은 자식들을 위해 살겠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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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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