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그룹 나오리 양승호 대표
아티스트그룹 나오리 양승호 대표

‘나는 오리’. ‘나오리~’. 음절 음절마다 강약을 조절하니 전혀 다른 뜻을 지니고 있는 한국 나오리(대표 양승호ㆍ이원면 원이로 2811-10).

지난해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의 공식 문화예술교육단체로 등록되면서 태안군의 문화예술 우위를 점하며 명실 공히 이름처럼 진정한 ‘아티스트그룹’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곳 나오리의 산 증인이자 이곳을 나오리로 명명한 양승호(58ㆍ사진) 대표. 뿌리를 찾아 돌고 돈 바람과 같은 세월. 2000년 이후 그를 맞은 건 다름 아닌 고향땅이었다.

앞에 드넓게 펼쳐진 염전이 고향의 진한 향수를 알리고, 뒷산 어릴 적 뛰어놀던 정원은 이제 중년 예술가의 혼을 담기에 충분했다. 넉넉하진 않지만 넘치는 것은 오히려 모자람만 못하다며 스스로에게 채찍과 날카로운 선을 잰다.

오늘도 기발하지만 결코 어색하지 않은 하나의 선과 흙을 만나는 장인은 ‘취미를 업으로 삼고 사는 삶이란 참으로 값진 일’이라며 하루하루의 고단한 삶이 기쁘다고 말한다.

지금은 이원초 관동분교. 양 대표가 다닐 때만해도 관동초 내리분교였던 모교가 사라진 지금 자동차가 귀하고 버스가 흔하지 않아 이원면 내리에서 멀리 원북까지 버스를 타려 걸어야 했던 길이 떠오른다.

참 그땐 얼마나 그 길이 멀고 험했는지 모른다며 흰 서릿발을 머리와 수염에 붙인 장인은 따듯한 차 한 잔을 내주는 걸로 그 시절을 회상한다.

“그래도 대학은 가야겠다싶어 시험을 봤는데 그게 당시 ‘그래픽’이라는 생소한 매체였어요. 근데 떨어졌지 뭐에요. 그래서 들어간 과가 ‘도자기과’에요”

그에게는 운명을 바꿀 시험이었지만 이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래픽과에 떨어진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무덤덤하게 자신의 얘기를 소설 속 장면처럼 되짚어 나간다.

가난한 시골 청년에게 서울 생활은 퍽이나 외롭고 배고픔의 연속이었으리라.

더욱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이십대 양 대표에겐 도자기를 만드는 순간이 최고의 기쁨이었고, 작업실에서의 시간은 낮과 밤을 잊게 해준 시계 바늘처럼 오묘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졸업해 사회에 나오니 정작 선배들이 하고 있는 영화간판 그리기가 눈에 띄더란다. 하지만 과감히 유럽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된다. 그렇게 해서 프랑스와 영국, 스위스를 돌며 기나긴 여정을 택한다.

특히 양 대표를 지금의 경지에 끌어 올려줄 영감을 준 건 프랑스의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전 어릴 때부터 시골이 좋더라고요. 유럽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죠. 불란서에서도 작은 시골에 박혀 작업에만 매진했었죠”

외부 간섭에 익숙지 않은 양 대표에게 유럽은 그야말로 그가 꿈꿔온 예술의 본거지였고, 그렇게 한국생활은 잊혀지는 듯했다.

“99년인가? 한국에 와서 부모님을 뵀는데, 아… 많이 쇠약해 지셨더라고요. 매일 머리 꼬라지는 그게 뭐냐, 옷은 왜 그렇게 입냐며 핀잔을 받기 일쑤였는데 어느새 늙은 부모님을 뵈니 자연히 고개가 숙여지더라고요”

그때다. 양 대표가 한국, 그것도 부모님 곁을 지키며 살겠노라 다짐했던 순간이. 아찔하지만 늘 양 대표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부모님. 그에게는 생명을 준 분들이자 그가 보답해야할 분들이기도 했다.

2000년도에 들어서면서 양 대표는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작업을 폈다. 그쯤 지금의 아내와 만나 행복한 결혼생활도 영위해 지금의 귀여운 초등학생 딸아이의 아빠도 됐다.

늘 마음가는 대로 일하고 남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야 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에 양 대표는 지금 본인만의 독특한 작업스타일도 고수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트임기법’이고 ‘생태예술’이다.

말 그대로 가뭄에 땅이 좌~악 갈라지듯 한 트임기법은 흙 속에 담긴 제대로 된 자연의 미를 대변하고 있고, 생태예술은 그를 무던히도 혼란케 했던 예술과 사회참여의 중간 고민의 흔적이다.

“농부는 피땀 흘려 땅을 가꾸고 곡식을 제공하죠. 그들이 볼 때 예술인들은 상상의 나래에서 뛰노는 한 마리 양인데, 저는 취미를 업으로 바꾸기 위해 74년도부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죠. 이후 프랑스의 한 전시회에서 큰 문을 만들어 꾸며놓았는데 그 문을 지나간 사람들의 반응이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마치 한국의 서낭당을 연상하는 이 문을 지나간 사람들 중 일부는 참회의 눈물을 흘렸고, 또 몇몇은 경건한 얼굴을 하곤 깊은 생각에 잠기더군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나는 그냥 노는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공감과 정신적 식량을 제공하는 정신적 농부구나를 말이죠”

명쾌한 답을 얻은 양 대표는 이후 취미로서의 직업을 편안하게 여기기 시작했단다. 그가 몇 년 전 인연으로 전진영(30) 씨를 제자로 들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양 대표의 생태예술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솔향기길 설치미술 10점이 지난해에 이어 사람들의 볼거리와 예술가들의 사회참여 정신에 입각에 이곳 이원에서 지속되고 있다.

또 중간에 잠시 정체기가 있긴 했지만 매년 태안의 대표 예술제로 각광받고 있는 나오리생태예술축제도 올 10월이면 벌써 7회째를 맞는다.

시작은 혼란과 고통의 연속이었지만 지금 그의 얼굴처럼 나오리의 예술 공간은 과거도 미래도 현재진행형이다. 부인 최씨의 현대무용과 자신의 도자기예술을 본떠 이곳을 ‘도예 무용 농어촌 생태체험공간’ 이라 지은 양 대표는 올해 축제기간에 외부에 선보일 생태공원조성사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여름의 뜨거움을 이겨낸 나오리 도자기들은 가마 속 열을 이긴 아름다움에 힘입어 매년 아름다운 꽃망울을 터트리며 향기롭게 날아오르길 고대하고 있다.

‘나오리’ 99년 불란서의 한 비디오작가가 갯벌도예를 선보이기 위해 이곳에 왔다 내리를 영문 나오리로 잘못 표기해 이름 붙여진 나오리.

사람 안에 있는 모든 정서적인 것들이 나오리라는 뜻으로 예술의 혼이 이곳 내리에 나와 꽃피우길 바라본다.

SNS 기사보내기
이미선 기자
저작권자 © 태안미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