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경진 태안소방서장
오경진 태안소방서장

보통 신부는 이마와 볼에 붉은 점으로 ′연지·곤지′로 화장하고, 혼인 증표로 신랑 신부가 반지를 주고받는다.
화장은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 중 하나이며  각 시대별 화장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 시대 특징과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엿볼 수 있다. 
최초의 화장품 케이스인 조개 껍데기 유물을 통해 네안데르탈인 시절부터 화장을 했을 거라고 추측해 볼 수 있고, 오늘날까지 원시 부족의 풍습을 이어 온 부족들을 통해 원시 시대 화장법과 의미를 되짚어 볼 수 있다. 고대나 중세 시대의 유물이나 기록을 보면 옛 사람들의 화장품 제조 방식이나 화장의 의미에 대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신분 사회에서 화장은 권력이나 계급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다. 당시에는 재료도 구하기 쉽지 않았기에 화장품은 무척이나 귀한 물건이었다. 
왕이나 귀족 등 특정 신분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백성들에게 위엄을 보이기 위해 되도록 화려하고 신비롭게 치장하기도 했고, 사회 분위기에 따라 화장을 절제하기도 하였다. 보석을 갈아 눈가에 바르기도 하고, 악어똥을 활용해 루주를 만들기도 했고, 수은이나 납처럼 위험한 물질을 화장품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으며 지금이야 다소 무모해 보이지만 그 시도들 덕분에 화장품과 화장술이 발달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후세 부인들은 모두 얼굴에는 붉은 연지(丹注)를 찍고 손가락에는 가락지를 낀다고 그 유래를 설명했다.
연지는 붉은 물감으로 여자들이 입술과 뺨, 미간 등에 바르거나 찍는 것이라 하면 곤지는 이마 가운데 연지로 찍는 붉은 점이다.
연지 곤지 역사는 신라의 여인들이 처음으로 연지 화장을 했다고 하며 실제로 5~6세기경 평안남도 수산리 고구려 무용총 벽화 여인상과 쌍영총 벽화의 ‘차마행렬도’에서 볼과 입술에 연지를 바른 여인들이 나타난다.
당나라 때는 얼굴에 연지를 찍은 모습이 예쁘게 보여 부인들 사이에 유행했다고 하며 중국 오나라의 손화 부인 뺨의 상처 치료에 흰 수달피 가루에 옥가루와 호박 가루를 섞어 발랐는데 흉터가 아름다운 것을 보고 부인들이 모방했다고도 한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규형은 흉노의 고유 습속이 중국에 전래 됐다가 다시 우리나라로 넘어온 것이라 했고, 기미 독립 선언문을 작성한 육당 최남선은 몽골족의 습속이 고려시대에 전래 된 것이라고 했다.
또 붉은색은 잡귀와 부정을 쫓는 주술적인 힘이 있다고 하여 새 신부의 연지 곤지 풍속이 생겨났다고 보기도 한다. 
특히 단옷날 비녀 끝에 연지를 발라 재액을 물리치거나, 일부 산간 지방에서 전염병이 돌 때 예방 수단으로 이마에 연지를 칠하거나 붉은색 종이를 오려 붙이는 행위도 이를 잘 말해 준다.
이로 수천 년을 내려오며 부정 타지 않는 행위로 남아 있는 연지 곤지 풍습에서 弘益人間이 되고자 한 조상들의 수련문화를 가늠해 본다.
반지를 주고받는 역사는 4800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의 호속전(胡俗傳)에는 “남녀가 처음 혼인 때 서로 한평생을 굳게 약속한다는 뜻으로 금으로 만든 반지를 줬다.” 했다. 
그리고 네 번째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는 건 고대 이집트 인들은 뇌보다 심장을 인간의 가장 귀중한 장기로 여겼고, 심장에 직결되는 혈관이 있는 왼손 약손가락에 반지를 낌으로써 신성한 결혼의 약속이 맺어진다고 여겨 전파됐다. 
그럼, 반지는 어느 손에 끼어야 할까. 오경요의(五經要義)에 따르면 음양으로 볼 때 “왼손은 양(陽)이고 오른손은 음(陰)이기 때문에 혼인 후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바꿔 낀다.”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손가락에 끼는 장신구는 기본적으로 두 개가 한 쌍의 가락지여서 기혼 여성이 끼는 것을 가락지, 미혼 여성이 끼는 것을 반(半) 가락지라고 불렀다가 ‘반지’로 줄여 부르게 되었다. 가락지는 기혼 여성 홀로 2개(한 쌍)를 착용했으며, 하나는 남편, 하나는 본인의 의미이다.
가락지는 조선시대가 유교를 지도이념으로 삼고, 그 사상이 생활윤리 전반을 지배하던 시대이므로, 혼례를 인간대사의 하나로 삼는 가운데 이성지합(二姓之合)과 부부일신(夫婦一身)을 상징하는 표지로서 생겨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혼인은 음양이 합하여 새로운 질로 나아가는 행위이기 때문에 삼라만상의 질서가 유지되는 기본이라 할 수 있으며 고대는 물론이고 중세현세의 권력은 혼인 동맹의 역사로 사회의 경쟁력을 유지하는 데 사용되었다.
동양에서는 혼인을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라 여겨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서양에서도 “바다에 나갈 때는 한번 기도하고, 전쟁에 나갈 때는 두 번 기도해야 하지만, 결혼할 땐 세 번 기도한 후에 결정해야 한다.” 말이 있는 만큼 혼인은 바다에 나가는 것이나 전쟁에 나가는 것보다 더 위험하고 중요한 일이다.
또한 낮에는 보이는 권력이 지배하지만 밤이되면 베갯머리에서 천하가 움직인다는 말도 있는 만큼 혼인은 인생에 중요하다.
요즈음 젊은 MZ세대들 중에는 경제적인 궁핍을 이유로 혼인을 기피하여 지난해 우리나라 출생률은 0.78명으로 OECD 국가에서는 최하위 이다. 
비혼과 저출산이 심각해지고 있는 요즘 같은 시대에 예로부터 전해오는 연지 곤지와 가락지의 역사적 유래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면서 좋은 배우자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는 것이 경제적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고 사회적 지휘를 상승시키는 최상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봤으면 한다. 그대들의 가락지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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