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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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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 유적지 탐방- 정읍, 고창 유적지를 다녀와서
태안미래  |  tanew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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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3.05.04  09:4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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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명자 안면읍 승언리

2023년 4월 22일 토요일. 
미세먼지로도 묻히지 않는 풀과 나뭇잎의 초록 향연이 유독 선명하게 보이던 화사한 봄날, 관광버스를 타고 태안동학농민혁명기념관을 출발해서 정읍으로, 고창으로 역사 여행을 떠났다.
‘동학농민혁명’하면 떠오르는 것은 최제우, 최시형, 전봉준 장군, 고부 군수 조병갑, 황토현 전투, 우금치 전투 정도가 전부였던 나에게 이번 동학역사 탐방은 두 번째 참가이다. 
작년 이맘때 공주, 논산 지역 유적지 탐방에 참가하여 역사 현장에서 문화 해설사의 깊이 있는 설명을 들으며 참 많은 사람들이 열정을 갖고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와 정신을 이어가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알게 되어 감동을 받은 기억이 난다.
올해는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지인 정읍과 고창을 탐방하게 되어 기대가 많이 되었다. 게다가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제14차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국제자문위원회(IAC) 정기회의와 임시회의 심사에서 세계기록유산 ‘등재권고’ 판정을 받았다는 문화재청의 발표도 있어서 이번 여행에 참가하는 마음이 더 즐거웠다. 
정읍에 있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은 동학농민혁명의 시대적 배경과 진행 과정, 기록물들이 잘 전시되어 있었다. 기념관을 나와 정면으로 보이는 곳이 동학농민군과 관군의 첫 전투가 있던 황토현 전적지. 1894년 4월 23일(음력) 동학농민군이 조선 정부군과 싸워 첫 승리를 한 곳이란다. 이날을 기려 그날의 양력으로 5월 11일을 동학농민혁명기념일로 정했다고 한다. 황토현 전적에 있는 동상과 부조 또한 감동적이다. 전봉준 장군을 중심으로 필남필부들이 모여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자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의 군상과 전국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의 부조로 상황을 재현하고 있다, 역사 속으로 들어간 듯 동상들 사이에 들어가 동상을 만져볼 수도 있고 나란히 서 볼 수도 있다. 동학농민혁명의 주역이 농민이었음을 표현한 작품을 보면서 역사를 보는 눈이 달라졌음을 느끼며 이렇게 조금씩 우리의 의식도 발전하고 확장해 간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이런 변화는 고창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다. 고창에서는 동학농민혁명 유적지를 조성하면서 동상 공모를 진행했는데 전봉준 장군을 혼자 우뚝 서게 하기보다는 당시의 여러 사람들과 함께하는 군상 모습의 조형물을 선정하였다고 한다. 고창에서는 정부의 지원금과 군민의 성금 등으로 기념관 건립과 공원 조성에 많은 투자를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태안도 동학농민혁명에서 기릴만한 기록과 사연, 유적지를 많이 갖고 있지만 아직 정비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다가온다. 공주, 논산 유적지도 역사 문외한이 찾아다니기에는 표시가 없어 어려움이 있다. 그런 면에서 정읍에 있는 동학역사 공간은 다른 곳보다 돋보이고 앞으로 고창도 정읍 못지않게 동학역사를 보존하고 알리는 중심지가 되리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과유불급,,, 기념관을 크게 짓고 동상을 많이 만드는 것만으로 동학 역사의 의미를 제대로 살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누구나 기념관에 들어와 활동하고 싶어지게 만드는 무언가가 풍부했으면 하는 짧은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정읍의 결실과 고창의 노력도 유족회와 관심 있는 사람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난 지 백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진 일이거늘 거기에 더해 쉽게 비판하며 풍부한 내용까지 요구하고 있는 내가 슬그머니 부끄러워지기도 한다.
이번 여행에서 이 역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공감이 되는 문구가 있었다.
“낫네 낫서 난리가 낫서 에이 참 잘 되얏지 그양 이대로 지내서야 백성이 한 사람이나 어디 남아나겟나”
혁명의 주동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도록 사발을 엎어놓고 둥글게 이름을 적어 넣은 사발통문에 적힌 글 일부이다. 탐관오리의 폭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이해할 수 있는 문구다. 밀려드는 외세, 급변하는 정세에 대응 못하는 무능한 정부, 그럴수록 판을 치는 탐관오리들, 살기 위해 몸부림을 쳐야했던 민중들. 죽창과 화승총으로 일본군의 서양식 신형 기관총에 대항해야 했던, 죽기를 무릅쓰고 달려나간 그들. 그들 또한 평범하게 농사지으며 가족과 단란하게 살고 싶었을 터인데 목숨을 걸고 싸우기까지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분노했고 얼마나 용감했을까. 1894년 11월 8일(양력 12.4.) 그 추운 겨울에 공주 우금치에서 수만의 동학농민군이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에 맞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결국 무기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배하고, 이듬해 3월 30일(4.24.) 전봉준, 손화중, 김덕명, 최경선 등 주요 지도자가 교수형을 당한다. 그 이후에도 잔여 농민군 세력이 각지에서 산발적인 전투를 계속한다. 해설사는 “비록 동학농민혁명은 실패로 끝났지만 이후 손병희 등 혁명의 주요 인물들이 3.1운동에 참여하면서 그 정신이 이어졌다”며 “동학농민혁명은 우리나라 풀뿌리민주주의의 시작점이라고 볼 수 있다”고 설명한다. 역사는 끝나지 않는다. 의병활동과 독립 운동, 독재 정권 하에서의 민주화 운동, 지금도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을 누군가 등이 역사를 만든다. 그들이 가슴에 담아야했을 고통과 번뇌는 얼마만하며 그들의 용기는 어디서 나올까. 고문 받고 고통 받은 많은 희생자와 가족들, 이름이 알려졌건 아니건, 이름조차 기억되지 못할지라도 그들의 의리와 용기에 내 작은 가슴이 울렁인다. 
또한, 구한말의 세계정세가 우리에게 매우 위태로웠듯이 지금도 우리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움직임이 우리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게 한다. 이런 시기에 동학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었던 것은 특히 의미 있는 일로 다가온다. 동학농민혁명을 민란으로 보고 외세(청)까지 끌어들여 진압하려고 했던 조선왕실, 이 기회를 틈타 청일조약을 근거로 우리나라에 침범하여 무고한 우리 민중을 무참히 살상한 일본. 일본이 우리 땅에서 저지른 만행은 일제식민시대 이전의 동학농민혁명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아니, 동학농민 희생자들을 포함하여 우리 역사에서 일본에게 사죄와 피해보상을 요구할 일이 더 있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에게 사회혼란의 원인을 뒤집어씌우며 죽인 일, 교토에 비행장을 건설하며 조선인을 강제 동원하여 강제노동을 시키면서 그들(조선인 강제 동원자)의 주거지로 제공된 교토의 우토로지구의 현재에 남아 있는 분쟁, 나가사키의 하시마(군함도) 조선인 노동자 강제동원 및 강제노동 문제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일본의 비인도적 살상행위에 대해 얼마나 연구를 하고 알리는 노력을 했나, 그렇게 무고하게 죽어나간 사람들과 그 유족들을 위한 피해 보상을 요구했나, 무엇보다 우리가 당한 일들을 후세에게 제대로 알리고 역사를 기억하게 하는 일에 얼마나 노력했는가. 이미 지난 일이니 과거에 발목을 잡혀 미래로 나가는 일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 묻어 두어도 좋은가. 독도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초등학교에서부터 배워온 일본인들과 장차 우리 젊은이들이 국제사회에서 소통하며 교류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 속에 일제식민시대에 우리에게 미친 피해를 3억달러 식민지 피해 보상과 5억달러 상업차관 제공으로 끝냈다고 주장하며 강제징용에 대한 배상, 사죄는커녕 역사 앞에 막말을 하고 독도를 자기들의 땅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을 보며 역사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작년까지 나는 동학에 대한 의미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관심이 없었기에 동학과 관련한 노력들이 있는 줄도 몰랐다. 그러나 탐방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유족회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여러 사람의 노력이 기념 재단을 만들고 기념관, 기념 공원 등을 만들어나가며 동학혁명에 대한 역사 재정립의 결실을 만들어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관심이 역사를 되살린다. 기념관과 동상을 세우는 것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방법이다. 그러나 관심을 지속시키는 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동학을 주제로 한 행사와 교육에 비중을 두었으면 한다. 동학농민혁명 유적지 탐방은 그래서 매우 좋은 활동이고 널리 홍보되기를 바란다. 특히 바라고 싶은 것은 학교 정규교육에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바른 교육이 행해지는 것이다. 정권의 눈으로 바라본 반란이 아닌 자주적으로 일어나 혁명운동으로 농민 스스로 일으킨 사회개혁운동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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