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 성 만
문필서예가 림 성 만

한식 상차림을 정형화한 반상 문화

조선 시대에 이르러 불교문화는 급격히 쇠퇴했다. 유교는 불교와 함께 다례(茶禮)도 축소시켰는데, 그 대신 웃어른과 조상을 공경하는 문화로 인해 반상 형식이 발달한다. 이 반상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전통 상차림이고, 반상은 가정에서 어른에게 대접하는 진짓상을 말하는 건데, 3첩에서 9첩까지 다양하며, 여기서 반찬은 재료나 조리법이 겹치지 않게 차렸다. 보통 가정에서는 3, 5, 9첩을 만들었고, 궁중에서는 9첩이나 12첩을 차렸다. 주로 유기나 사기가 많이 쓰였는데, 한 상에 올라가는 그릇의 재질은 모두 같게함이 특징이다. 
집집마다 형편에 따라 목기를 쓰거나 장에서 저렴한 것을 사기도 하고, 고급 사기를 전문가에게 주문 제작하기도 했다. 그 때문에 식기를 보면 그 집의 재정 상태를 알 수 있었는데, 여유가 있는 집은 여름철에는 음식까지 시원해 보이는 백자나 청백자 반상기를 쓰고, 겨울철에는 은기나 유기에 담아냈다. 서민에겐 백자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옹기를 주로 썼는데, 그릇은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구분하는 근거가 됐다.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 때면 앞에 놓인 밥상에 따라 그의 신분이 드러났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원행을묘정리의궤>라는 책이다. 정조 19년에 열린 연회를 기록한 것으로, 정조 즉위 20주년과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함께 축하는 잔치를 상세히 묘사했다. 
혜경궁 홍씨는 정조의 어머니이자 사도세자의 부인으로, 정조는 그를 모시고 수원으로 행차해 일주일 동안 성대한 연회를 열었는데, 이 책에는 당시 참석한 사람들을 지위로 구분하고, 그들 앞에 어떤 반상을 차렸는지 자세히 기록돼 있다. 예를 들어 임금은 흑칠원족반이라는 상에 유기그릇을 놓고 찬은 반, 갱, 조치, 찜, 자반, 구이, 침채, 장 3가지의 7첩상을 받았는데, 반면 궁인은 상 없이 반, 탕의 2첩을 받았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식기들

식문화의 뿌리는 깊고도 끈질기며, 어제의 첨단이 내일의 유물이 되는 시대지만 그릇은 예나 지금이나 별 변화 없이 우리 식탁 위를 채운다. 특히 조선 시대에 널리 사용된 그릇 대부분은 오늘날 우리 가정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이다. 명칭도, 모양도 어색하지 않으며, 조선 시대 대표 식기를 통해 우리 그릇의 구성을 들여다본다.
우선 다양한 국물 음식이 발달한 고려의 영향으로 조선 시대에도 밥과 국의 기본식단이 이어졌고, 사발과 대접은 당시에도 가장 친숙한 그릇이었다. 사발(沙鉢)은 ‘사기로 만든 발’을 의미하며 밥그릇으로 이용됐고, 대접은 사발보다 큰 형태로 국이나 면을 담았다. 사발과 종자의 중간 크기로, 반상기에 쓰이는 보시기는 지름 20cm를 넘지 않고 뚜껑이 달려있다. 뚜껑이 있는 것은 합(盒)보시기라고 하고, 합은 찜이나 죽을 담을 때 쓴다. 밥상 위에 올려두고 필요할 때 사용하는 공기(空器)도 보시기 종류 중 하나다.
보시기는 반상에서 첩의 수를 의미하며, 조선 시대 상차림에서 가장 많이 이용된 식기다. 보시기보다 형태가 작은 것은 종자(鍾子) 또는 종지라고 했으며, 여기에는 음식의 간을 맞추는 양념을 넣기 때문에 크기는 작아도 상 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3첩부터는 간장을 올렸고, 5첩에서는 간장과 초간장, 7첩에서는 간장과 초간장, 초고추장을 종자에 담았다. 찬이 거의 없는 간단한 차림에도 반드시 간장이 올라갈 만큼 종자는 우리 식탁의 기본 요소였다.
한식에서 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크기 때문이었는데, 그렇다면 이런 장류를 만들어내는 식기는 어떻게 부를까. 아이에게 마당에서 고추장을 가져오라고 한다면, 누군가는 ‘독’에서 꺼내라 하고, 누군가는 ‘항아리’에서 가져오라고 할 것이다. 비슷하게 생긴 이 저장, 운반용 토기는 크기에 따라 분류된다.
1984년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에서 제정한 ‘용도별 토기의 명칭과 규격’을 보면 높이 50~100cm는 독, 높이 30~50cm는 항아리, 높이 30cm는 단지로 규정한다. 식기도 크기에 따라 명칭을 달리했으며, 지름 20cm가 넘는 것은 바리, 지름 10~20cm는 사발, 5~10cm는 보시기, 5cm 이하는 종지다. 접시와 쟁반도 지름으로 구분하는데, 20cm 이상이면 쟁반이고 이하면 접시다.
지름보다 높이가 크면서 높이가 20cm 이하인 것은 잔으로 규정했으며, 차 문화가 발달한 고려 시대에는 뜨거운 차를 마시기 좋도록 높이도 어느 정도 있었으나, 조선 시대에는 차의 자리를 술이 대신함으로써, 받침도 손잡이도 필요 없는 단순한 모양의 잔이 주를 이뤘다. 잔과 함께 짝을 이룬 것은 귀대접이라고 하여 액체를 따르기 쉽도록 한쪽이 삐죽 나온 형태로 만들어진 것을 말한다. 
차를 마실 때는 찻을이 식히는 용도로 썼고, 술이나 양념을 옮길 때도 사용했다. 지금의 문화와 가장 다른 식기를 꼽으라면 바로 여자의 그릇, 바리다. 여자는 사발이 아닌 바리에 밥을 먹었는데, 바리는 오목주발과 비슷하나 아가리가 조금 좁고 꼭지가 달린 게 특징이다. 이 밥그릇은 조선 시대 우리 문화를 보여주는 매개체기도 하다. 가부장적인 대가족 제도로 인해 조선 시대에는 남자와 여자를 가르는 내외법이 엄격했는데, 남녀는 같은 밥상에서 식사를 할 수 없었고, 남자 식구는 독상을 받는 반면 여자는 대체로 부엌에 모여 식사를 했다. 식기는 남녀와 주객을 나누는 도구이기도 했던 셈이다. 
조선 시대의 이런 식사 문화를 타지인의 눈으로 본 기록이 있는데, 1928년 경성에서 일본어로 발간된 <내선융화요체>는 조선에서 수십 년 생활하며 여러 보통학교의 교장을 지낸 오사카 미쓰구가 쓴 책이다. 그는 어느 집에서 술을 대접받은 것을 언급하며 ‘술잔을 대접하는 것은 주인이 하는 일이고, 남녀가 자리를 함께하면 안 되기 때문에 부인이 식사 자리에 나오지 않는다’고 썼다. 그리고 ‘시중을 드는 아이나 하인은 바깥쪽 복도에 서서 술자리를 아주 신기한 듯이 쳐다보고 있다’
‘이것은 장유유서의 예가 있는 것이며, 주종의 계급이 엄중하고, 웃어른과는 결코 식사를 함께하지 않는 것이 규율이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현재 그릇은 더 이상 신분과 남녀를, 주객을 구분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더 큰 가치를 담고, 사람의 됨됨이, 가능성, 능력치를 통틀어 ‘그릇’이라고 하는데, 누군가에게 ‘그릇이 크다’는 말은 이미 훌륭한 데다 앞으로 더 훌륭해질 가능성까지 갖고 있다는 극찬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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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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