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 성 만
문필서예가 림 성 만

꿀벌이 힘찬 날갯짓을 한다. 겨우내 벌집 속에 틀어박혔던 것이 지겨웠는지 이리저리 윙윙거리며 만개한 꽃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데, 따뜻한 햇살 비치고 매화의 꽃망울이 터지는 지금 그렇게 봄은 우리 곁으로 찾아왔다. 봄은 늘 그렇듯 술래가 되어 돌아온다. 술래인 봄은 찾을 것이 참 많은데 땅속에 꼭꼭 숨은 씨앗도 찾아야 하고 나뭇가지에 꼭꼭 숨은 잎새도 찾아야 한다. 아무리 숨었어도 봄은 반드시 찾아내고야 마는데, 아니 찾아내지 못한다고 해도 술래놀이 하는 아이들처럼 ‘못찾겠다 꾀꼴, 나오너라 꾀꼴’하면 모두들 꾀꼬리처럼 꾀꼴꾀꼴 노래하며 고개를 내민다. 봄은 그렇게 찾아왔다. 물론 누구에게도 봄이 찾아왔겠지.

4월 들어 집밖 작은 골목에서 해바라기 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날이 따뜻해지기도 했고 새잎들이 얼굴을 보여주고 있기도 해서다. 겨우내 죽은 듯이 지내온 검은 대나무(烏竹)는 어느 날부터 새잎을 하나둘 내더니 급기야 잎에 생기가 돋는다. 이 기쁨을 무엇에 비할까. 겨울이 되면서 잎끝이 마르고 응애의 습격도 받았던 터라 사실 포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나의 나약함을 일깨우듯 잎을 틔우다니.

나는 그 귀여운 연녹색 잎을 조심스레 만저보았다. 이제 막 피어난 잎은 믿을 수 없게 연하게 기분 좋은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아직 충분한 증산 작용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일까.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바람을 통과하고 해를 쬐고 건조한 대기에 맞서다보면 잎은 더 튼튼해질 것이다. 색이 짙어지고 두께는 두터워지면서 더 또렷한 잎맥을 보여주게 되겠지. 봄이 가져온 근사한 소식이었다.

하지만 대나무 잎의 아름다움은 다소 애매했다. 얇은 줄기에 어딘가 애처러워보일 정도로 가느다란 가지들을 달고 있었고, 가까이 들여다보아야만 겨우 알 수 있는 미세한 잎을 달고 있었다. 1미터가 넘는 나무 크기를 고려해보면 잎이 차지한 존재감은 아주 희미했지만 어쩌면 그래서 특별하지 않은가 생각했다. 거의 죽었다고 생각하면서도 겨울 내내 틈틈이 물을 준 내 시간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얼어죽었을 거야, 소용없을 거야, 하면서 왜 나는 물 주기를 멈추지 않았을까. 회생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어서였다. 말라 죽었으리라는 판단이 이성의 영역이라면 기다림은 마음에서 이는 일이니까. 그래서 우리는 지구가 멈추지 않는 한 봄이 어김없이 오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끈질기게 봄을 기다린다. 

잡지나 SNS 속 식물들은 말 그대로 그림 같은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만 실제로 실물을 길러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모두들 제멋대로 자라니까. 웃자라 대책 없이 무성해지고 그냥 위로만 직진하고, 그런 문제들을 다 안고 있는 우리 집 소나무 분재도 새잎을 피웠을 때 그래서 나는 당혹감을 느꼈다. 빛이 잘 들지 않는 발코니 유리창에 기대고 어느 순간 일조량이 충족되자 새잎을 피운 것이기 때문이다. 유리창이 없다면 줄기가 버틸 수 없을 정도의 잎이었다. 내가 기르는 식물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면 미안한 일이지만 솔직히 약간은 파리채 같달까. 뭉크의 그림 속 피사체들처럼 기이하게 뒤틀린 느낌이었다. 

대나무가 커지면서 차라리 위쪽 대를 자를까도 생각했다. 그러면 뭔가 일반적인 형태로 다시 자라지 않을까. 전지가위를 들 일이 있을 때마다 그 앞에서 고민했지만 끝내 자르지는 못했다. 그렇게 망설이는 겨울을 보내며 나 역시 여러 번 생각의 겹을 벗었고, 그중에는 지나간 시절들에 감정적 서사를 부여하지 않겠다는 결심도 있었다. 그건 있는 것과는 다르고 동일한 감정적 반응을 하면서 그 상처에 계속 갇히는 것과도 달랐다. 더 이상 나를 약자로 여겨 연민하지 않는 것, 재작년 초여름 위기를 맞아 뒤틀렸던 나를 사람들이 위로와 상처를 이해해준 것, 내가 원하던 형태와 달랐다며 삶의 어느 시절을 다 부정하지는 않는 것.

대나무와 소나무에는 그저 자기가 가장 왕성하게 살아낼 수 있는 쪽으로 힘을 썼을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대나무가 잎을 피운 그것은 가장 자연스러운 꽃처럼 느껴졌다. 작년 대나무 옆에 의자 하나를 놔두었는데, 그 의자에 앉아 미소짓던 남녁 처자의 모습이 아직도 선해서 의자 하나를 더 구해 그 옆에 나란히 놔두었는데, 언제 또 처자가 와서 함께 앉아 볼 수 있을지. 어제는 대나무의 마른 잎들을 손으로 떼주었다. 낙엽이 되어 진작 떨어져야 했을 마른 잎들이 계속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새잎이 드문드문 나고 있었다. 이렇게 해주는게 맞나 싶었지만 일단 잎을 따기 시작하자 손길을 멈출 수는 없었다. 흐린 창을 호스물로 촤악 닦아내는 것처럼, 밀어두었던 설거지를 반짝반짝하게 해내는 것처럼 기분 좋은 상쾌함이 들었다. 

대나무 발치에 소복하게 자라고 있는 자주괭이밥도 조금 뜯어주었다. 깊이 뿌리 내려 대나무의 생장을 방해하는 것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키우는 대나무 근처에서 괭이밥은 매우 어엿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다. 괭이밥이 자리 잡으면 확실히 식물들이 잘 자랐기 때문이다. 우연일 수 있지만 얼음 상태이던 대나무가 깨어난 것도 사실 괭이밥과 함께였다. 실제로 괭이밥은 인간의 몸에 해독작용을 하고 온갖 염증을 다스린다. 해충 응애의 천적으로도 알려져 있으니 짐작이 아주 틀린 건 아닐 것이다. 물론 결과가 항상 좋지는 않으니 신중해야겠지.

남녁 처자가 보내준 묵은 배추김치를 정리하면서 함께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보지만, 처자는 ‘아이고’ 그러시겠다. 이제 싱크대에서 말끔하게 정리하고나니, 봄은 그냥 날씨가 풍경으로만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실제의 잎들과 함께 오니까. 이참에 청소를 마치고 책상 앞에 앉아 이 글을 쓰면서 그래도 새봄이 왔다는 기분만은 여전했다. 그러한 환희는 분명한 마음의 영역, 선택이나 선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명의 가장 깊은 곳에서 조용히 번지는 자연스러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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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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