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군전군민피해대책위 부위원장 이남열
태안군전군민피해대책위 부위원장 이남열

이순신 장군은 임진년 여러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원균의 시기질투를 밀고해 선조의 오해를 사게되어 28일 간 옥고를 치른다.
이에 모친은 고초를 겪고 있는 아들을 만나고자 전라좌수영에서 배를 타고 한양으로 행차하던 중 법성포 어느 포구의 선창에서 밤샘 중 닫줄이 풀려 사망(83세)하는 불행을 맞이한다.
당시 죄인의 몸이였던 이순신 장군은 어머니의 장례를 모실수 없었다. 삼형제 중 두 형은 일찍 생을 마치면서 장군과 어머니의 관계는 매우 애틋할 수 밖에 없었다.
급 풀려난 이순신 장군은 전라삼도수군 통제사에 부임되었고 정유년 그해 명량해전을 치른다.
오늘날 유래없는 12척의 판옥선으로 133척의 화선이라 불리는 안택선(安宅船) 물리치고 대승한다.
야사에 따르면, 불운하게 생을 마친 어머니를 생각하며 죄인의 심정으로 해전에 임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때 남긴 그의 언명이 “필사즉생 필생즉사” 으로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망구(望九)를 바라보는 나이에 차꼬를 차고 있을 아들의 뒷바라지하기 위해 노구를 끌고 한양으로 향했었던 그 어머니를 상기할때 ‘필생즉사’ 는 장군에게 무의미했을 것으로 보여진다.
악재는 어머니로 끝나지 않았다. 명량해전에서 대패한 왜군은 이순신 장군의 아산 본가를 급습해 막내아들까지 잔인하게 살해하며 그의 슬픔에 분노만을 남겨 놓는다.
이후 벌어진 해전이 노량해전(무술년)이다. 어머니와 아들까지 잃은 그에게는 마지막 ‘조선’ 만이 위안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그는 화선을 쫓던 판옥선의 방탄목을 제거하고 끝까지 추적하여 전멸하고자 하였으나 무댓포(조총)를 맞자 “적에게 나에 죽음을 알리지 말라” 고 명령한다.
앞세운 아들의 죽음을 연상했던 그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초연한 윤리관을 각인했을 것은 명백하다.
효를 폄생의 신조로 삼았던 그의 생에 있어 불운하게 객사한 어머니, 복수의 칼날에 청춘을 빼앗긴 아들과 노닐던 고향의 정취를 더욱 그리워했으리라.. 
농아인 형과 동생인 필자 역시 동병상련의 심정이다.
이순신 장군이 오늘날 영웅으로 칭송받는 것은 나라에 충성만이 아니라는 필자의 판단이다. 어머니와 아들의 시신을 염습해주지 못한 자식으로 아버지로서, 그 도리를 다하지 못한 비극적 운명은 '효' 가 근간이였으며 그 규범이 대한민국의 초석이 되었고 곧추 세운 기둥이였음은 명백한 진실이다.
난중일기에는 100여 차례나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기억’ 을 일기로 남겼다고 한다. 효가 충으로 이어지고 충이 효로 연결되는 충효사상이 그의 대표적인 영웅일기를 남겼다는 확신이다.
디스토피아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공동체 사회에서 태안군청 공무원과 태안군 의회 의원님들께 묻고자 합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쥐고도 더 큰 안락을 위해 정녕 군민을 버리려 하는 것인지요? 일신의 안락은 안일함과 나태를 잉태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계신가요?
공과사 충과효는 차제하고 부모에 대한 그리움 자식된 도리가 무엇인지 그 규범이 무너질때 우리네 삶의 안위는 지킬 수 없다는 것 알고 있는지요?
국가의 녹봉을 받는 공직자의 책무는 국민이 위임한 대리권을 행사하는 것이며 그 의무인 법령의 준수를 여러분은 마땅히 지키고 있는지 묻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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