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 성 만
문필서예가 림 성 만

그릇의 용도는 더할 나위없이 명료하다. 시대가 바뀐다고 사발이 보시기가 되지 않는다. 그릇은 그 자체로 삶이고 생각인데, 흙으로 빚어 오짓물을 입혀 구운 뚝배기는 겉은 투박하지만 안은 매끄럽다. 불에 한 번 데우면 오래도록 열기를 머금는 것이 특징이다. 추운 겨울날 서민은 식당에 앉아 설렁탕과 국밥 한 사발을 먹는데, 투가리, 독수리, 툭배기, 툭·수리 등 이름은 달라도 모두 탕반을 담는 그릇이다.
이것으로 우리는 뜨끈한 국물을 사랑하는 한국인의 특성, 별다른 장식 없이 자연 재료 그대로의 소박함을 좋아하는 한국인의 심성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그릇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빈자와 부자 모두 공유하는 주방용품에 지나지 않지만, 후대에 와서는 당대의 생각과 가치, 삶을 반영하는 유물이 된다. 그렇게 물건의 일상성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빛을 더하기 마련이다.
다시 표현하자면, 그릇을 유물로 보존하고 연구하는 까닭은 그릇에 대한 기술이 함축돼 있어서가 아니라 이를 통해 그 시대의 삶과 문화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탄생한 이래 오랜 세월 삶을 함께해온 그릇은 질감과 모양을 통해 당시 어떤 생활이 이루어졌는지 생생하게 알려주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우리 민족의 미의식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상징물이다. 선사시대부터 시작된 그릇의 역사를 연구한 학자들은 여기에서 한국인의 미의식을 발견한다. 이를테면 안료가 있던 시대에도 재료 고유의 색을 유지하며 그릇에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는 것이나, 역사를 통틀어 일관성 있게 차분한 색의 식기를 사용한 것을 통해 한민족이 고요함을 사랑한다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다. 

매일 식탁 위에서 시대를 담은 그릇
‘인도이지정(因陶以知政)’이라는 말이 있다. 질그릇을 보면 그 나라의 정치를 알 수 있다는 뜻의 중국 고사다. 여기서 말하는 질그릇은 도자기로, 어느 시대든 도자가 발달할 때는 사회가 안정되었을 때라고 한다. 고려 시대 귀족의 식생활이 너무 화려했던 것이 그 예다. 이때는 신분에 따라 식기를 달리했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식기로 꼽히던 청자는 귀족 계급만 사용할 수 있는 귀한 것이었다. 
고려 때는 불교문화가 발달해 다기의 화려함도 절정을 이뤘다. 부처님께 차를 올리는 헌다(獻茶)와 귀족 사이의 음차가 확산되면서 뛰어난 기술력을 드러내는 다기(茶器)가 출현했다. 궁 안에는 차를 담당하는 부서가 별도로 있었을 정도니 고려 시대가 어떤 때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질그릇과 자기, 그리고 사기까지 전통 그릇의 명칭은 언제나 우리를 혼란스럽게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관을 지내고 명지대에 재직 중인 윤용이 교수가 펴낸 <우리 옛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우리 그릇을 이해하고 분류하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이 가득하다. 그 부분법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도자기라는 말이 쓰이나 원래 우리 선조는 ‘도기’ 아니며 ‘자기’로 분리해서 사용했습니다. 두 가지는 서로 다른 종류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합해서 부모라고 하듯이, 도기와 자기를 합한 것이 ‘도자’ 혹은 ‘도자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기와 자기의 기본적인 차이점은 우선 흙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보통 도기를 만드는 흙은 진흙인데, 진흙을 한자도 도토(陶土)라고 합니다. 자기는 진흙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자기의 재료는 돌가루인데, 그것을 자토(瓷土)라고 합니다. 어떤 분은 유약을 입혔는지 혹은 안 입혔는지의 여부를 기준으로, 도기와 자기를 구분한다고 이야기 하지만 그건 나중의 문제입니다. 도토로 만들었는지, 자토로 만들었는지 하는 것이 도기와 잔기를 구분하는 제일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기준입니다. 
(....)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자토를 사토(沙土)라고 했습니다. 돌가루로 만든 흙이라는 의미에서 사토입니다. 사토로 만든 그릇이므로 당연히 사기라는 말이 나왔겠지요. 자기와 사기는 구별되는 게 아니라 같은 개념입니다.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듯이, 자기의 속어가 사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도자기의 우리말이 ‘질그릇’과 ‘사기그릇’이므로 사기란 말을 서자처럼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19세기 실학자였던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에도 ‘자기는 사기의 속어다’라고 나와 있습니다. 사기와 자기가 같은 개념임을 분명히 알아두어야 합니다. 사기와 자기는 같은 말인데 우리나라에서만 널리 쓴 용어입니다. 만일 사용하고 싶다면 청자를 청사기, 백자를 백사기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한편 조선 시대에는 유기가 많았다. 선대에 예를 다하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은 조선 문화에서 유기는 제사 용구로 쓰이며 중요한 살림으로 다뤄졌다. <경국대전>의 ‘공조(工曹)편’에는 유기를 전담해 놋그릇을 생산하는 유장(鍮匠)이 있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유장은 국가공무원으로 본조와 내수사, 상의원에 소속되어 있었는데, 제기는 물론 식기류와 혼사 용구, 세숫대야와 주전자 등 모든 것이 유기로 만들었다. 특히 조선 중기 이후에는 놋전이라는 유기점이 따로 있었는데, 개성과 안성 등지의 유기점은 전국적으로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연탄을 주 연료로 사용하면서 유기는 급격히 자취를 감췄다. 놋쇠가 연탄가스에 쉽게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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