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 성 만
문필서예가 림 성 만

내가 쓰고 있는 물건들은 어디서, 누가 만들었을까? 문득 호기심이 일어 하나하나 유심히 들여다보면 구두는 중국, 부채는 캄보디아, 손수건은 베트남에서 건너온 건데, 생각해보면 격세지감에 젖기도 한다. 노동집약적인 제품들을 수출하면서 한국이 산업화 시대로 들어선 것이 불과 반세기 전 아닌가. 그럼에도 아직 ‘메이드 인 코리아’는 남아 건재하다.

공장하면 사람들은 흔히 바쁘게 돌아가는 기계와 수많은 물건들을 떠올린다. 그러나 공장에는 사람이 있고, 공장은 치열한 노동의 현장이며,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어울리는 삶의 터전이다. 산업환경이 변화하면서 많은 것들이 달라졌지만, 더 이상 공장의 기계들은 전만큼 바쁘지 않다. 한때 대한민국 성공신화의 주역이었던 제조업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주인공의 자리를 내려놓았다. 그러나 여전히 공장은 건재하며, 첨단화·현대화하고 있는 대규모 산업단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삶터 곳곳에서 작지만 중요한 것들은 만들고 가꾸는 이들이 아직 그곳에 사람들이 있으며, 만들고 다듬고 가꾸는, 삶이 있다.

<망중한> 바쁜 일과 중에도 잠깐의 틈은 존재한다. 노동의 순간들 사이, 잠깐의 휴식은 힘겹기에 더욱 달콤하게 느껴진다. 꾸벅 숙인 아이의 허리만큼 ‘쉼’이 주는 즐거움은 깊다.

<땀방울> 점점 뜨거워지는 날씨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일에 대한 집중과 열정이 만든 땀방울이 가득한 현장, 온전히 일에 집중한 이들의 모습은 그 어떤 풍경보다 아름답다.

<퇴근길> 고된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손에 든 봉지 하나가 지친 하루를 위로한다. 맥주 한잔, 과자 한 봉지뿐이더라도 함께 해서 즐거운 이가 있다면 그곳이 만찬장이다.

<벽너머> 벽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는 사진에 담기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저 벽 너머에, 저 사각틀 밖에서 여전히 삶을 이끄는 수고로움이 아낌없이 채워지고 있음을.

<LP> LP가 LD로, CD로 바뀌고 다시 MD, MP3로의 변화는 매우 짧은 시간에 이뤄졌다. 2004년 마지막 LP공장이 문을 닫는다는 뉴스를 봤는데, 어찌된 일인지 다시 생겼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 같았던 LP는 찾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했다. LP 특유의 선율을 기억하는 나에겐 반가운 소식, 우리나라에도 LP 팩토리가 다시 설립되어 LP를 찾는 마니아들에게 느긋하고 편안한 음색을 들려주고 있다.

<초콜릿> 수도꼭지를 돌렸을 때 물 대신 초콜릿이 나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초콜릿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해봤을만한 상상이다. 그리고 실제로, 초콜릿 공장의 배관에는 초콜릿이 콸콸 흐른다. 다양한 형태의 초콜릿을 제조 공정에 따라 배합하려면 건물과 건물 사이에 초콜릿 배관이 있어야 하는데, 이 비용 때문에 초콜릿 공장은 서울을 떠날 수 없다고 한다. 서울 어딘가에 초콜릿이 흐른다.

<브래지어> 브래지어 공장은 큰 기계가 없다. 수십 대의 재봉틀만 있고, 그 재봉틀을 돌리는 담당 기술자가 있는데, 겉옷에 비하면 아주 작은 옷이지만 20개 이상의 부자재와 더 많은 봉제 과정을 거쳐야 하나의 브래지어가 생산된다. 과정이 복잡해 경력이 많이 쌓여야 혼자 만들 수 있다고 한다. 브래지어 공장은 장인이 작품을 만드는 공방에 비견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지구본> 여기저기에 수많은 지구들이 널브러져 있는 풍경, 내가 처음 지구본 공장을 보고 느낀 것은 ‘하느님의 작업실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특별한 도법을 이용해 평면인 지도를 원형이 구체에 맞게 제작하고 코팅을 거친 뒤 북반구와 남반구를 끼워 맞추면 하나의 지구가 탄생한다. 천지창조가 따로 있겠는가. 눈앞에서 지구본이 태어나는 과정이 바로 손안의 천지창조인 셈이다.

<도자기> 도자기를 만드는 공장은 물레마다 도자기 장인이 앉아 도자기를 빚고 있지 않을까 싶지만 사실은 큰 기계가 박력 있게 쿵쿵 찍어낸다. 물론 장인의 공정도 있는데, 고급 도자기에 넣는 그림은 화공들이 직접 그리고 전사지도 붙인다. 백지 같던 도자기가 아름다워지는 과정이다. 중요한 것은 공정보다는 담길 그 무엇이겠지만 도자기 공장의 작업 풍경은 그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다.

<맥주> 양태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 주당들은 술 만드는 곳을 궁금해 한다. 양조장, 술 공장은 그들에게 천국일 터, 맥주 애호가에게 맥주공장 만한 낙원(?)은 또 없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견학코스도 제공되는데, 비록 공장에서 살 수는 없지만 현장에서 바로 만든 맥주를 맛볼 수 있다니 이쯤 되면 최고의 호사가 아닐 수 없다. 지친 퇴근길, 맥주 한 캔이 주는 즐거움을 떠올린다면 세계 제일의 고마운 공장이다.

<악기> 음악을 만드는 공장이니 독특할 수밖에 없다. 작업자의 작업 능률 향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만든 악기의 성능을 시험하다보면 공장에는 악기가 내는 청명한 소리가 가득 찬다. 악기 공장 근로자 3년이면, 콩쿠르에 나갈 수는 없어도 듣기에 썩 괜찮은 소리를 낼 수 있는데, 그것은 성능시험 덕분이다. 음악을 만드는 공장이 있다면 바로 악기 공장이지 싶다. 서당 개 3년이면 풍월을 읊고, 철도길 3년이면 개구리도 기적을 울린다는 말이 있지 않음인가.

SNS 기사보내기
태안미래
저작권자 © 태안미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