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 성 만
문필서예가 림 성 만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쉰다섯에 제주도로 유배 와 예순세살에 육지로 돌아갔는데, 사랑하는 아내도 그사이 머나먼 육지에서 세상과 이별하였다. 추사는 제주도에서 가장 벽지인 대정현 유배지에서 감내하기 힘든 고통을 견디며 추사체를 완성했고, 명작으로 이름난 ‘세한도’를 그렸다. 유배의 고장 대정고을엔 추사 유배지와 추사가 즐겨 찾았던 단산(丹山), 제주향교가 있고, 제주의 겨울을 느낄 수 있는 풍경이 있어서 한겨울 바람 부는 대정고을에서 위대한 정신을 만나보려 한다.

제주 서귀포시 대정고을은 온통 ‘추사’의 흔적으로 뒤덮여 있다. 추사 김정희 선생이 유배생활을 한 대정고을은 대정읍 동부에 있는 인성·안성·보성·구억·신평리 등 5개 마을을 합쳐 이르는 말이다. 평화로 노선버스를 타고 도착한 대정 지역에서 처음 맞닥뜨리는 곳은 ‘추사 유배지 정류장’인데, 바로 앞에는 대정성지(大靜城址)가 묵중한 모습으로 서 있다.

대정성지는 조선시대 제주도의 3읍성 가운데 하나로 대정현에 만들어진 성곽 유적지다. 복원사업이 거의 끝난 대정성지는 길이 1467m, 높이 5.22m로 남문과 동문, 서문과 문 앞에 있던 각 4기씩의 돌하르방들이 제주도 민속자료로 보존되고 있으며, 이곳에서 오른쪽 도로로 400m쯤 가면 제주 추사관과 추사적거지가 나온다. 

추사는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고난과 좌절, 체념을 딛고 글씨와 그림, 시, 산문에 이르기까지 후대에 길이 남을 업적을 이루었다. 그를 당대 최고의 학자로 올려놓은 추사체라는 서체와 훗날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도 그의 유배시절 완성됐는데, 이를 기리기 위해 대정성 동문 터 옆에는 제주 추사관이 자리 잡고 있다. 관람객이 붐비지는 않지만 끊이지 않고 추사의 작품과 유배지를 찾는 발길이 이어지고, 성터와 추사관 곳곳에는 추사가 좋아했던 수선화가 심어져 있다. 

‘세한도’를 모티브로 지어진 추사관으로 들어서자 일단의 관람객이 문화관광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둘러보고 있었는데, 해설사는 관람객들에게 추사 일생부터 추사체와 세한도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었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해보면 추사 선생은 유배 시절 자신을 낮추고 이룬 학문과 예술의 업적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데, 추사에 대해 공부하면 할수록 더 깊이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지하에 위치한 추사관의 작품 관람이 끝나고 나오면 추사가 유배생활을 했던 적거지와 통한다. 복원된 적거지는 유배생활의 대부분을 보냈던 당시 대정고을의 부자였던 강도순의 집이었는데, 제주 남제주군(현재의 서귀포시)이 1983년 복원한 적거지는 고증에 따라 60여 평의 터에 초가 다섯 채를 지었다. 2007년 7월에는 사적 제487호로 지정됐으며, 강도순의 집은 안거리(안채), 밖거리(바깥채), 모거리(별채), 쇠막(외양간)과 말방아(연자매)까지 갖춘 부잣집이다. 모거리에는 추사와 초의선사가 차를 앞에 두고 앉아 대담을 나누는 모습이 재현돼 있고, 밖거리에는 추사가 제주의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치던 모습을 재현했다. 유배지 곳곳에 있는 감나무와 팽나무, 상록수들이 초가와 잘 어우러지는데, 유배지에서는 산방산(山房山)과 단산(丹山)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대정고을에 도착한 추사의 첫 유배지는 안성리 송계순의 집이었다. 추사는 이곳에 위리안치됐다가 2년여가 지난 뒤인 1842년 제주도 전통 이사철인 신구간에 인근 강도순의 집으로 적거지를 옮겼고, 유배가 끝날 무렵에는 식수의 불편 때문에 안덕계곡이 있는 창천리로 옮긴 것으로 전해진다.

추사는 안동 김씨 세력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1840년 7월 55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제주로 유배됐다. 그에게 내려진 형벌은 ‘대정현 위리안치’였다. 조선시대의 유형은 죄인을 먼 곳에 유배해 격리하는 형벌인데, 이 가운데 절도안치(죄인을 섬으로 유배보냄)와 위리안치(유배 중인 죄인의 집 주위에 가시울타리를 치는 형벌)는 더욱 가혹한 형벌이었다. 여섯 차례의 고문을 당하고 36대의 곤장을 맞아 죽음의 문턱에까지 갔던 추사는 전주, 해남을 거쳐 뱃길로 제주 화북까지 들어왔고, 이어 대정고을에 도착했다. 한 달이나 걸린 긴 여정이었으니 얼마나 심신이 고달팠을까. 추사가 유배지에서 풀려난 것은 그로부터 만 8년 3개월이 지난 1848년 12월이었다.

추사의 제주 유배생활은 궁핍했다. 그가 지인과 집에 보낸 서한에는 낯선 풍토, 입에 맞지 않는 음식, 잦은 질병으로 고생한 내용이 생생하게 나온다. 제자인 화가 ‘소치 허련’과 ‘우선 이상적’ 친구 ‘초의선사’가 바다를 건너 그의 유배지를 찾아왔지만, 외롭기는 마찬가지였다.

기약 없는 유배생활에 익숙해져 가면서 추사는 제주에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한다. 학문을 갈구했던 수많은 제주의 젊은이들이 그의 처소를 드나들었는데, 추사 연구에 한 획을 그은 유홍준 교수는 <추사 김정희>에서 “유배객(추사)을 맞이한 것은 뛰어난 선생을 얻은 것과 같았다. 게다가 추사는 워낙 제주 사랑이 타고난 교사였다”고 평가했다. 추사의 5촌 조카이자 제자인 민규호는 추사는 “제주에 거처한 9년 동안 조용히 지내며 책을 읽고 제주 사람들을 가르치니 인문이 크게 열렸다. 탐라의 황폐한 문화를 개척한 것은 추사로부터 시작됐다”고 했다. 유배지의 주인 강도순도 그의 제자였는데, 강도순의 증손자 강문석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대정 지역에서 민족교육을 한 한남의숙을 설립한 뒤 일제강점기 모슬포청년회 회장으로 민중 계몽운동을 벌였다.

대정향교 학생들의 기숙사이자 공부방엔 동재에 걸렸던 ‘의문당(疑問堂)’이라는 현판은 추사와 제주에 있는 제자들과의 교류 흔적을 보여준다. 현재 추사관에 전시된 이 현판 뒷면에는 훈장 강사공의 요청으로 1846년 11월 추사가 쓰고 향원 오재복이 새겼다고 돼 있다. 대정향교는 유배지에서 2km 남짓 떨어진 단산 아래에 있다. 유배생활을 하는 고난 속에서도 추사가 독서를 할 수 있었떤 것은 제자 ‘우선 이상적’ 덕분이었다. 그는 역관으로 드나들던 청나라에서 여러 책을 구해 추사에게 보냈는데, 이런 그의 정성에 감동한 추사는 제주도에 유배온지 5년이 지난 59살 때인 1844년, 생애 최고의 작품으로 꼽히는 ‘세한도(歲寒圖)’를 그려줬다.

‘세한도’라는 표제와 소나무와 잣나무, 가옥 등으로 이뤄진 유배지의 풍경을 그려 “이상적은 감상하라(우선시상·藕船是賞)”라고 쓴 뒤 “날이 차가워 다른 나무들이 시든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가 늘 푸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내용이 담긴 발문을 썼다. 제주 추사관에 있는 ‘세한도’는 당대 최고의 추사 연구자였던 후지츠가 치카시(1879~1948)가 1939년 복제해 만든 한정본 100점 가운데 한 점이다.

추사를 생각하고 연구해보면 세한도의 진정한 의미는 자전적 내면 풍경을 담은 한 폭의 자화상 같은 그림이라는 데 있다. 실제 세한도를 시각적으로 지배하는 조형과 의미를 분석해보면 이는 곧 추사 자신이요, 추사의 현실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세한도는 마음속 이미지를 그린 것으로, 그림에 서려 있는 격조와 문기가 생명이다. 화법(畵法)만이 아니라 필법(筆法)과 묵법(墨法)의 서법(書法)까지 보아야 제맛 그리고 제멋의 제가치를 알 수 있다. 

추사는 자신의 적거지를 귤중옥(橘中屋)이라 하고, 한겨울 은은한 향기를 내뿜는 수선화를 아끼고 사랑할 정도로 제주의 자연을 예찬했다. 그는 “때마침 수선화를 대하니 아름다운 선비가 몹시 생각났다(政對水仙花甚思佳士)”고 할 정도였다. 제주 추사관에는 추사의 글씨를 탁본으로 찍어 만든 수선화부가 전한다.

단연코 추사는 “한국 문화사의 위인 중 위인이며, 단군 이래 최고의 서예가라 할 만한 분”이 아니던가. 어떤 칭송도 아깝지 않은, “추사는 제주도에 갇혀 있었지만 갇힌 사람이 아니었으며, 제주도에서 그는 서너 단계를 비약했고, 천재적인 능력에 안주하지 않고 유배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한 가지에 몰두하는 그의 자세는 감동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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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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