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 성 만
문필서예가 림 성 만

차가운 겨울날의 풍경
소나무 두 그루가
서로를 감싸 안는다
그림속의 빈 섬
쓸쓸하지만 외롭지 않은

“나는 저 장면을 떠올리고는 늘 몸서리친다. 한증막 같은 배소를 삼엄하게 감싸는 절대 고독의 추위, ‘세한도’는 설한에 둘러싸인 진경의 겨울이 아니라, 빈 섬에 갇힌 정신 유폐에 관한 엄혹한 리포트다.”
입덧처럼 추사 김정희(1786~1856)선생과 뜨겁게 연애하게 된 ‘세한도’ 인기척도 잘 느껴지지 않는 화면 속에 나무 네 그루와 집 한 채. 황량한 풍경을 쓱쓱 붓질하고 있는 사람의 천진하고 무심한 표정, 자기 탐닉에 몰입해 있는 듯한 붓끝의 동세(動勢)는 결국 나를 추사 선생에게 푹 빠지게 했으며, 이때가 가슴이 쿵쾅거리던 연애의 시작이었다. 160년 전 천재와의 만남, 사실 보통으로 추사 선생을 떠올린다면 똑똑하고 단정하며 조금은 도도한 양반의 전형적 모습일 수도 있었으리라. 오만함을 스스로 경계했을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사실 추사 선생도 꽤 ‘인간적’인 남자였다. 요즘말로 말하면 평양기생 죽향(竹香)과 스캔들이 나기도 했으며, 아내의 고독과 상심을 배려하는 마음을 편지에 띄워 보내기도 했으며, 집안의 대를 이으려 친척의 아들을 양자로 삼기도 했다. 21세기에 추사 선생을 논하는 건 어쩌면 고리타분한 일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러나 찬찬히 뜯어보면 추사 선생은 시대를 넘어서는 지적 깊이와 인간적 면모를 지닌, 매력적인 천재가 아닐까.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지극히...
<추사(秋史)의 편지>
“네가 편지에서 고백한 말, ‘겨우 두어 글자를 쓰면 글자가 따로 놀아 결국 귀일(歸一)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 깨침이 귀하다. 네가 서법(書法)문에 들어갈 수 있는 진경(進境)이 거기서 시작되느리라. 잠심(潛心)하고 힘써야 한다. 괴로움을 참고 이 한 관문을 넘어서야 통쾌한 깨달음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이 깨침을 이루기가 지극히 어렵더라도 절대로 물러나지 마라. (...) 나는 지금 육십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아직도 귀일됨을 찾지 못하였다. 너와 같은 초학자야 말해 무엇하랴. 너의 그 한탄소리를 들으니 나는 도리어 기쁘구나. 장래에 있을 너의 성공이 그 한마디에서 시작되리라”
김정희는 추사체라는 최고의 글씨는 물론이고 「세한도」로 대표되는 그림과 시와 산문에 이르기까지, 학자로서 뿐만 아니라 예술가로서도 최고의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조선의 천재 예술가로 불린 그는 비록 여러 부인을 두었지만 가족에 대한 사랑만은 끔찍했다. 세상을 떠나기 두 달 전, 김정희는 ‘좋은 반찬은 두부, 오리, 생강나물이요.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딸 손자면 족하다’라는 글을 남겼다. 그에게 행복은 가족이 둘러앉아 먹는 소박한 밥상이었다.
그는 자주 아내에게 편지를 보내 투정을 부리며 살뜰한 마음을 표현했으며, 서자였던 아들 김상우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하루는 아들 김상우가 제주로 유배를 간 김정희에게 글 공부가 되지 않는다며 하소연하는 서신을 보냈다. 아들의 마음을 읽은 아버지는 위로의 편지를 보낸다. 본인 역시 육십이 되도록 학문을 깨우치지 못했다며 겸손을 내보이고, 한탄하는 그 자세를 높이 사며 아들을 다독였다. 그는 유배기간 동안 꾸준히 아들을 위해 편지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늘 자식의 고민을 깊이 이해하고 엄하게 꾸짖지 않았다. 유배기간 동안 편지를 통해 다정하고 세세하게 난(蘭)치는 법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것은 글씨를 쓰기 위함이 아니다>
19세기 추사 김정희가 활동했던 조선후기는 개항을 앞둔 봉건사회였다.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는 전통에서 현대로 대전환기의 패러다임이 뒤바뀌는 소용돌이 선상에 놓인다. 그러한 때 전통적 미의식을 깨고 변화의 거대한 물결 위에 승선한 사람이 추사 김정희다.
힐난과 처절한 고독 속에서 자유로운 감성 그대로를 표출해낸 그를 현대서(書)의 출발로 보는 근거다. “추사 괴(怪)의 아름다움은 전적으로 추사 개인의 자의식적 발로다. 전통의 표상이자 사회적 약속인 문자구조를 필획(筆劃)의 굴신지의(屈伸之意)로 해체하면서 ‘이것은 글씨를 쓰기 위함이 아니다’고 선언하는 지점이다. 더 이상 전통으로서 집단 속에 머물러 있는 추사가 아니다” 이와 함께 “추사체는 특히 서체조형적인 측면에서 왕법(王法) 중심의 첩학(帖學)과 청조 금석고증학의 비학(碑學)을 혼용시켜 괴(怪)의 미학을 창출해낸 결정”이다.
추사는 24세 연행(燕行) 때 청조 학예계 거장인 78세 옹방강(翁方綱)과 47세 완원(阮元)으로부터 격찬을 받으며 두 분을 평생 스승으로 모신 후 경학과 금석고증학, 서법을 연마하여 학예일치의 경지를 일생에 걸쳐 구축한다. 전 중국서법가협회 주석 천펑(沈鵬, 1931~)은 “변혁의 중심에 있었던 김정희의 서법(書法) 작품은 강렬한 반역적(反逆的) 성격, 특히 비(碑)로서 첩(帖)으로 들어가는 모종의 불협조(不協調)의 성격은 일반인으로서는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김정희의 서법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조선민족(朝鮮民族)의 강렬한 독립과 자유와 장강의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천펑, 회통(會通)과 독창(獨創)의 종사(宗師 : 한국 서성(書聖) 김정희, 도록中>
19세기 동아시아의 급변하는 시류에서 이룩한 추사 김정희의 글씨, 세계성과 현대적 미에 대한 평가는 매우 의미심장한 시사점을 던진다. 우웨이산 중국미술관 관장은 추사의 현판을 두고 “현대성이 농후하게 담겨 있다”라고 설파했다. 또 일본의 추사 연구가인 후지츠카 치카시는 “조선 근세사상사에서 탁월한 경사(經師)로서 가장 이채를 띠고 있는 것은 김정희이다. 경학(經學), 금석(金石), 서도(西道), 사장(辭章), 천산(天算)에 걸쳐서 깊이 최고의 경지까지 들어갔다. 특히 청조 문화에 정통하고 새로이 실사구시의 학(學)을 조선에 수립 선포한 위대한 공적에 이른 것은 전에 그런 사람도 없었고, 고금독보(古今獨步)라는 느낌이다”라고 썼다. <후지츠카 치카시 지음, 김현영(金炫榮) 해체번역, 동아시아의 문화교류(日·鮮·淸의 文化交流), 도록中>
한편 서(書)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10화를 끝으로 폐지된다. 식민지서구화가 진행되면서부터 서화동원(書畵同源)이 분리된 것이다. 따지고 보면 “동아시아 예술에 있어 전통의 요체인 서(書) 언어를 빼면 그림마저 그 토대가 무너짐은 물론 서구미술의 수용과 소화 재해석에 있어 결정적인 한계가 존재함은 정작 현대미술이 더 잘 알고 있다”
이번 ‘추사 김정희와 청조문인의 대화’ 귀국전은 ‘괴(怪)의 미학(美學)과 동아시아 서(書)의 현대성(現代性)’을 주제로 대련, 두루마리, 서첩, 병풍 등 총 120여 점을 관람하면서 나의 공부는 언제 끝날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 2022년 11월 30일, 경기도 과천 ‘추사박물관’ 관계자는 김정희가 중국 연경에 갔을 때 중국 문인들과의 대담 중 김정희에게 묻기를 “자네 호(號)가 무엇인가?” 묻자 김정희는 “나의 자(字)는 추사(秋史)이고, 호는 보담재(寶覃齎)입니다”라는 필담 유적을 찾아내어 그 실체를 공개했다. 이로서 이제부터는 김정희의 보편적 아호(雅號)로 불리던 ‘추사’가 ‘보담재’로 바뀌어야 하는 논의가 국학자들의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어서 추사 연구를 공부하는 나로서는 큰 관심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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