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어제 미처 아는 척을 못했다면 뭐 어때요 그래서 내일이란 게 있는 거 아닌가요

‘지금도 잊혀 지지 않아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가수 이 용씨가 부른 ‘잊혀진 계절’의 첫 구절입니다. 그럼 곧 겨울이 온다는 건데 이건 너무 쓸쓸하지요.

늦가을 길목에서 D형에게 이 글 보냅니다. 형, 어느 광고 카피에 ‘미안해, 고마워, 그래도 미안해’가 보이더군요. 저에게도 마음이 넉넉했으면 이런 글도 안적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모든 분들께 미안하고 고맙고 또 미안하지요.

D형, 산다는 게 이렇게 힘든 건가요. 형이 저를 얼마나 제어해주고 걱정 해주시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래도 형은 옳은 말씀 잠언처럼 한마디 해주시는 것에 저는 만족합니다. 그러면 감히 형 노릇 다해주시는 거죠. 예쁜 여자와 함께 술을 마시는 것, 그것보다 술좌석에서 형의 촌철살인 그 한마디가 무서우면서도 가슴에 와 닿아요. 하지만 형도 건강은 챙기지 못했더군요.

D형, 옛말에 ‘열가지 재주 가진 놈이 먹고 살 끼니가 없다’란 말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재주는 많은데 도통 살림살이에 보탬이 안 된다는 말이지요. 제가 그 부류에 속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남들은 저한테 재주가 많다고 말하는데 그 것이 맞는 말인지는 모르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측량, 서예, 그림, 글쓰기, 칼럼, 시, 환경운동, 향토사연구, 등 그래도 열 가지는 안 되는 데 어찌 재주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어림도 없는 일이지요.

D형, 그럼 못하는 게 뭐냐고 묻는 사람도 많아요. 화투, 장기, 바둑, 당구, 운전, 춤, 골프 등 많지요. 그럼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물어요. 형께서도 알고 계시지만 우선 음악감상을 즐기지요. 그리고 사색과 등산을 좋아하고 술은 친구처럼 대하며 사찰순례를 즐기는데, 물론 종교적 관점에서가 아닌 고즈넉함을 즐기기 위해서죠. 아- 그리고 바다풍경을 좋아합니다. 언제나 그대로 변하지 않고 저를 반겨주는 그 모습이 좋거든요. 또 하나는 글을 엮어 책을 펴내는 건데, 돈을 바라고 그러는 건 아니지요. 그래도 후회는 없는 것이 나름 최선을 다했기에 하는 말입니다.

D형 ‘인간적으로 여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느 선배가 물은 적이 있는데, 고민할 필요도 없이 여자 정말 무섭지만 그래도 여자, 생각하면 가슴 설레지요. 수컷 본능이 아닌 제 생애 여자는 영원히 중요한 화두입니다. 형께서도 공감하지 않나요. 그건 이성으로 보다는 골똘히 생각해 볼 일이 많아서 그런 겁니다. 남성이 여성을 그리워하는 건 동서고금 공히 당연함 아닐까요. 저는 지금 여성보다 현실에 처한 절박함에 또 다른 꿈을 꾸고 있습니다. 그 꿈은 소박하기에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니기에 전 오늘도 꿈을 키워 나갑니다.

D형, 세상살이는 저와 생각이 다른 제도적 문제 때문에 쉽지 않더군요. 그래도 그 문제를 현명하게 해결하는 것이 꿈이며 희망입니다. 그 다음은 웃음이 일겠지요. 그렇다 해도 힘든 것은 잠시 잊고 들에 핀 꽃을 바라보는데, 이때만은 마음이 평화스러워집니다. 보면 볼수록 귀엽고 예쁘지만 뭐가 예쁘냐고 말한다면 할 말 없지만 그래도 저한테는 예쁜 걸 어떡합니까.

D형, 요즘은 너무 경쟁의식이 많은 것이 사회의 현상입니다. 물론 경쟁의식이 없다면 발전은 없겠지만, 그 전에 상생이 먼저면 어떨까요.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는 경쟁은 종족 번식을 위한 우리의 유전자에 새겨진 본능적 행위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의 위대한 점은 본능을 본능이라고 규정짓는 행위를 벗어나 더 고귀한 가치를 찾는데 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자기를 희생하고 남을 위하는 이타적 행동이나, 함께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느끼는 행동, 이런 모든 것들을 본능과 유전자로 치부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는 게 사실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경쟁이야 불가피하지만 우리가 경쟁 만능주의에 젖어 경쟁하지 말아야 할 것조차도 대결하고 상대를 짓누르며 살진 않나 생각해 봅니다.

D형, 바쁘다는 핑계로 한참동안 바닷가를 찾지 못했습니다. 버스타고 바닷가를 가면서 펼쳐진 산과 들판을 보니 늦가을 정취가 물씬 풍겨오더군요. 햇볕에 반짝이며 억새가 춤을 추는 모습은 가히 절경입니다. 바다, 언제 보아도 가슴 시원하게 해주지만 한편으로는 제 심성을 울렁이게도 합니다. 바닷새들도 반갑게 날아오르고 어느새 노을빛이 웅장하더군요. 저는 노을빛을 볼 때마다 가슴 설레는 버릇이 남아 있습니다. 무어라 딱히 표현할 수 없는 참을 수 없는 설레임. 노을이 어둠과 바뀔 때 근처 횟집은 포근한 안식처가 되지요.

D형, 오늘 하루를 기억하면서 출출한 몸속에 투명한 막소주 한 잔을 넣으니 금세 몸은 하늘없이 아침 햇빛처럼 붉음으로 변하는 군요, 취기어린 몸, 늦가을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D형, 어제 미처 아는 척을 못했다면 뭐 어때요. 그래서 내일이란 게 있는 거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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