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한 국가의 문화적 이미지는 경제와 산업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굳이 한국의 브랜드 이미지를 정한다면 개인적으로는 백자 달항아리와 정자(亭子)를 심벌로 삼고 싶은데, 혹자는 달항아리가 정말로 그렇게 위대한 예술적 가치를 갖고 있는 것인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지만, 달항아리는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것이어서 각별히 생각되지 않을 뿐 모나리자에 견줄 수 있는 달항아리의 미적 가치를 이미지 메이킹에 활동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며 못내 아쉬움이다. 
조선 백자 달항아리는 오랫동안 그 예술적 가치가 묻혀 있었다. 그러다 반세기 전, 미술사가 최순우, 화가 김환기 등 한국미에 대해 선지적 안목을 갖고 있던 분들에 의해 한국미의 상징으로 재발견되어 이제는 서양의 문명비평가까지 그 미감에 공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도자기의 아름다움은 이웃 나라 중국, 일본의 그것과 비교할 때 확연히 드러난다. 
일찍이 일본인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는 한·중·일 3국의 미술적 특성을 비교하면서 “중국 미술은 형태미가 강하고, 일본 미술은 색채감이 뛰어나며, 한국 미술은 선이 아름답다”면서 중국 도자기는 권위적이고, 일본 도자기는 명랑하며, 한국 도자기는 친숙감이 감도는 것이 특징이라고 했다. 그래서 중국 도자기는 멀리서 감상하고 싶어지고, 일본 도자기는 곁에 놓고 사용하며 싶어지는데 유독 한국 도자기는 손으로 어루만져 보고 싶어진다고 했는데, 전적으로 동감이다. 
그런 친숙감, 절대로 권위적이지도 않고, 뽐내지도 않는 평범한 형식 속에 깊은 정감이 서려있는 그 은은한 미감은 다른 나라에서는 감히 찾아보기 힘든 한국미의 특질인데, 이런 미적 특질은 한국인 자신    보다 외국인의 눈에 강한 인상으로 들어오곤 한다. 
해마다 여름이면 한국미술사 워크숍이 열린다. 내겐 관심이 가는 공부인데, 이 프로그램에 줄곧 참여해온 서양의 한 여성 큐레이터에게 한국의 이미지에 물으니 그녀는 단숨에 정자(亭子)를 꼽았다. 한국의 산천은 부드러운 곡선의 산자락이나 유유히 흘러가는 강변 한쪽에 정자가 하나 있음으로 해서 문화적 가치가 살아난다며 이처럼 자연과 친숙하게 어울리는 문화적 경관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국의 표정이라고 했다. 
우린 무엇으로 기억하고 사는가. 정자는 도자기와 마찬가지로 한·중·일 동양 3국의 공통된 건축문화인데, 이 또한 3국의 특질이 다르다. 중국의 정자는 유럽의 성채처럼 위풍당당하여 대단히 권위적이고 일본의 정자는 정원의 다실로서 건축적 장식성이 강한 데에 반하여 한국의 정자는 삶과 유리되지 않은 생활 속의 공간으로 세워졌다. 
정자는 누마루가 있는 열린 공간으로 2층이면 누각, 단층이면 정자라 불리며 이를 합쳐 누정이라 하고 일반적으로는 정자로 통한다. 정자는 사찰, 서원, 저택, 마을마다 세워졌지만 그중에서도 관아에서 고을의 랜드마크로 세운 것이 규모도 제법 당당하고 품새도 잘생겼다. 정자는 생김새보다 자리앉음새가 중요한데, 그래서 강변에 세운 관아의 정자에 명작이 많다. 남한의 3대 정자로는 진주 남강변의 촉석루와 밀양 낙동강변의 영남루, 제천 청풍 남한강변의 한벽루를 꼽는데, 북한에선 평양 대동강의 부벽루와 연관정, 안주 청천강의 백상루와 의주 압록강의 통군전 등이 예부터 이름이 높다.
정자에는 대개 내력을 알려주는 기문(記文)이 걸려있는데, 기문은 당대의 문사에게 의뢰되었다. 이는 매스컴이 없던 시절 ‘특별기고’에 해당하는 셈이어서 문사로서는 자신의 학식과 인문정신을 한껏 펼쳐 보일 수 있는 좋은 기회였기 때문에 많은 명문이 정자의 기문에서 나왔다. 세종 때 하륜이 보물 제528호인 한벽루(寒碧樓)에 쓴 중수기문은 가히 교과서에 실릴만한 명작이다.
“생각건데, 정자를 수리하는 것은 한 고을의 수령된 자의 일로서는 아주 작은 말사(末事)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것이 잘되고 못됨은 실상 고을의 다스림과 깊이 관계되며, 다스림에는 오르내림이 있어 민생이 즐겁고 불안함이 늘 같지 않듯이 정자의 흥폐도 이에 따른다. 하나의 정자가 흥하고 폐한 것을 보면 그 고장 사람들이 즐거운가 불안한가를 알 수 있고, 그것으로써 한 고을 다스림의 실태를 엿볼 수 있을지니 어찌 그것이 하찮은 말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성종 때 서거정이 공주 금강변 정자산 산마루의 취원루(聚遠樓)에 붙인 기문 또한 천하의 명문으로 그 경륜의 시각은 참으로 원대하다.
“정자를 세우는 것은 다만 놀고 구경하자는 뜻만이 아니다. 이 정자에 오르는 사람으로 하여금 들판을 바라보면서 농사의 어려움을 생각해보게 하고, 민가를 바라보면서는 민생의 고통을 알게 하고, 나루터와 다리를 보면서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내를 잘 건너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 곤궁한 백성들의 생업이 한 두 가지가 아님을 여기서 바라보고 죽은 자를 애도하며 추운 자를 따스하게 해줄 것을 생각하게 한다 … 이는 멀리 있는 사물에서 얻어낸 것을 정자에 모으고, 정자에서 모은 바를 다시 마음에 모아서, 내 마음이 항상 주인이 되게 한다면 이 정자를 취원루라고 이름 지은 참뜻에 가까울 것이다.”
정자는 고을 사람들의 만남과 휴식의 공간이면서 나그네의 쉼터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정자에는 여기에 오른 문인 묵객들이 읊은 좋은 시들을 현판으로 새겨 걸어놓고 그 연륜과 명성을 자랑하고 있는데, 이를 국문학에서는 누정문학이라고 부른다. 특히 청풍 한벽루에는 유명한 문인들이 남긴 시가 많은데, 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 고산 윤선도, 다산 정약용 등이 모두 한벽루를 다녀가며 시를 남겼다. 이는 옛날 서울에서 경상좌도로 갈 때 죽령을 넘어가자면 남한강 뱃길을 타고 올라와 청풍에서 하루를 묵어가곤 했기 때문이다. 그중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서애 유성룡이 임진왜란이 잠시 소강상태로 들어갔을 때 고향 안동으로 가는 길에 지은 시다.
“지는 달은 희미하게 먼 마을로 넘어가는데 / 까마귀 다 날아가고 가을 강만 푸르네 / 누각에 머무는 나그네는 잠 못 이루고 / 밤·서리 바람에 낙엽 소리만 들리누나 / 두 해 동안 전란 속에 떠다니면서 / 온갖 계책 마련하랴 머리카락만 희었구나 / 두 눈엔 서글픈 눈물이 그치지 않아 / 아스라이 난간에 기대어 북극만 바라본다.”
과연 <징비록>의 저자다운 시다. 그러나 누구나가 다 서애 같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은 코로나19 광풍 속에 지나가고 말았지만, 국토의 어디로 떠나든 차창 밖으로는 문득 저 멀리 정자가 나타날지니 그러면 고려시대 박윤문이 단양을 지나가다 취운루(翠雲樓)라는 정자를 바라보면서 읊은 시에 공감을 보내게 될 것이다.
“관동으로 가는 길목, 저 멀리 보이는 정자 하나 / 십리 소나무 그늘은 참으로 그윽하고 / 들판엔 길 잃은 송아지 누워 있네 / 정자 난간엔 청량한 바람이 불어 가는 이를 붙들건만 / 이번 길에는 올라가서 감상할 겨를이 없어 안타깝구나 / 그러나 내 언젠가는 술병을 들고 와서 한 차례 쉬다 가리라.”
우리나라의 정자란 정녕 이런 공간이다. 달항아리와 마찬가지로 정자 또한 너무도 흔하고 친숙한 것이기에 지나쳐왔던 것이지만 이제는 ‘한국의 이미지’를 상징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내세워도 한 점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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