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자국

「존재를 증명하는 흔적」

우리는 살아 움직이고 만지고 만들고 잡기도 한다. 다른 대상, 그리고 세상과 교감하며 살아가는데, 그것은 에너지를 나누고 순환하게 하는,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행동일지 모른다. 그렇게 서로 ‘닿음’으로 인해 생겨나는 흔적을 우리는 자국이라 부르며,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든,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수많은 순간 우리는 어딘가에 자국을 남긴다. 그러기에 문화재에 남아있는 자국에는 우리 조상이 살아온 삶과 그 숨결이 담겨 있다. 소박한 아름다움이 담긴 분청사기에 좀 더 가까이 다가서면 흙을 빚고 매만지고 다듬었던 도공의 투박한 손자국이 남아있고, 합죽선(접는 부채)이나 참빗, 붓대에는 뜨겁게 달군 인두로 세밀하게 무늬를 찍어낸 낙죽장의 예술혼이 새겨있다.
자국은 과거 이 땅에 살았던 생명체의 존재를 증명해주기도 한다. 암각화 옆에 남아있던 공룡발자국은 1억 년 전 한반도의 선사시대 모습을 증언해주며, 제주 용천동굴에는 통일신라시대 사람들이 드나들며 남긴 햇불자국이 선연하고, 분단 이후 영영 멈춰선 경의선 장단역의 증기기관차에는 뚜렷한 총탄자국이 남아 뼈아픈 역사를 기억하고 통일 염원의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문화재에 남아있는 자국은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흔적이 아니며, 오래전 그 시간 우리조상의 삶이 그 숨결이 묻어있는 소중한 기록이다. 그 가치를 발견하고 되새기며 전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의 삶을 더 의미 있게 만드는 일이다. 

「소박함 속에 응축된 다채로운 기법」

분청사기(粉靑沙器)는 청자와 동일한 계통의 점토로 형태를 만들고 표면에 백토(白土)를 분장(粉粧)한 자기이다. 양식적으로는 고려시대 말기 상감청자에 연원이 있고 16세기 후반에 백자의 영향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청자와 백자를 합친 것과 같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백토를 분장하는 방식은 바르기(귀얄분장)와 담그기(덤벙분장) 두 가지가 있는데, 귀얄분장은 식물의 줄기나 동물의 털과 같은 재료로 만든 ‘풀비’ 형태의 넓고 굵은 붓으로 백토를 바르는 기법이며, 덤벙분장은 백토를 물에 풀고 기물을 담가 입히는 기법이다. ‘덤벙’은 ‘크고 무거운 물건이 물속으로 떨어져 들어가는 소리’를 뜻하는 의성어이다.
분청사기의 제작에는 백토분장을 바탕으로 선(線)·면(面) 상감기법, 인화상감기법, 박지기법, 조화기법, 철화기법 등의 다양한 시문기법이 사용되었다. 16세기 조선분청사기의 분장은 문양장식이 없이 백토만을 입히는 방향으로 변화가 진행되었고, 덤벙기법으로 백토를 전면에 분장한 분청사기는 부드러운 표면 질감과 색상으로 인해 마치 백자처럼 보인다. 이러한 분장의 변용에서 다양한 미감이 표출되었고, 이는 인화분청사기의 ‘규격화된 단정한 맛’과 ‘정밀한 추상성’ 조화와 철화분청사기의 ‘회화적인 구성과 자유분망함’, 귀얄분장과 덤벙분장 분청사기의 ‘대범하고 활달한 신선함’ 등 상반된 의미의 미학적 평가로 응축되었다.

「사기에 남긴 기록」

분청사기는 조선시대 초기인 태종-세종 연간(1400~1450년)에 한성부의 여러 관청과 지방관아에서 사용한 대표적인 국용자기(國用磁器)이다. 공적인 용도의 분청사기는 각 도 군현의 자기소(磁器所)에서 사기장인호(沙器匠人戶)가 현물의 세금인 공물로 제작하고, 해당 지방관부가 주관하여 중앙정부에 상납하였다. 세종연간인 1424~1432년에 자료조사가 이루어진 ‘세종실록지리지’에는 팔도의 자기소 139개소가 기록되었다. 자기소에서는 중앙정부가 지방관부를 통해 내려보낸 공물 제작 지침인 견양(見樣)에 의거하여 사기 장인이 형태, 크기, 문양 등이 규격화된 공납용 분청사기를 제작하였고, 자기의 사용처인 관사명(官司名), 제작자인 장인명, 납부지역인 지명 등을 표기하였다.
관사명의 표기는 국용자기의 분실을 막기 위해 태종 17년(1417)에 사용처를 표기하여 관용물자임을 밝히도록 한 결과이다. 또 장인명의 표기는 세종3년(1421)에 자기의 품질을 개선하고자 제작자를 표기하도록 한 결과이다. 사기장인은 구성원의 수에 따라 10~30명 내외의 대호(大戶), 중호(中戶), 소호(小戶)로 구분된 사기장인호에 속하였고 지방 관부에서는 장인명부인 장적(匠籍)을 관리하였다. 

「사기장의 자취, 선명한 지문」

사기장의 이름은 막생(莫生), 막삼(莫三), 막동(莫司), 금동(今동同), 아마도 있었을 돌쇠(石乙金)까지, 산골짜기 물길과 가까운 가마자리(요지窯址)에서 5백년이 넘는 시간의 강 위로 떠오른 한 글자, 두 글자, 더러는 성(性)이 있는 세 글로로만 전해진다. 언제 태어나고 죽었는지, 어떤 일을 했는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특별한 단 한 사람, 이 땅에 분청사기가 자취를 감춘 때에 백자를 만들었을 충주 사기장 한막동이 임진년(1592)에 발발한 난리 통에 왜의 첩자가 되어 중국 명나라 군대를 염탐한 죄로 목이 베이고말아 사기장인의 일이 아닌 일로 역사에 기록되었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접반사(接伴使) 서성(徐?)의 장계를 보건대, 충주의 사기장 한막동(韓莫洞)은 왜놈의 첩자가 되어 중국 명나라 군대를 염탐하였다고 하니, 대단히 흉악합니다. 즉시 목을 베어 효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선조실록 39권, 26년(1593) 6월 12일」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도공들, 그들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한 고유한 개체로서의 한 사람이 아니다. 더러는 양인이기도 하나 대부분 공천(公賤)이거나 노자(奴子)이거나 공천노자 아비와 양인 어미 사이에서 난 노자였다. 
이 땅에서 귀하지 않은 신분으로, 특별할 것 없는 흔하고 비슷한 이름으로 살아갔으며 더러는 역사의 질곡에 휘말리기도 했다. 그들은 귀하지 못한 신분 때문에 보통명사화한 기호(記號)로 깨진 파편에 화석처럼 박혀있다. 그러나 익숙한 분장의 자취로, 거침없는 손길로, 선명한 지문(指紋)으로 온통 뒤범벅인 가마터의 흔적에서 사지장인으로 오롯이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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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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