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석만
문필서예가 림석만

마지막 곡선

-간이역-

                 문필서예가 림석만

 

멈춤이 사라진 시대

우린 어디쯤에서 멈춰야 하는가

세상이 빠르게 움직이는 시대이지만

가끔은 멈춰야 한다

한 마리 누에고치처럼 서서히 움직여

지상 최고 속도를 내는 고속열차라지만

과연 무엇을 위해 그렇게 빠른 걸까?

멈춰야한다 작지만 정감 있는 간이역에서는...

 

속도가 삼켜버린 지상의 길들

애초 길은 직선이 아닌 곡선이었다

하지만 지금 곡선은 어디로 갔나

속도로는 절대 그려낼 수 없는

곡선의 부드러움 곡선은 품이 넓다

주위의 산·들·강 모든 풍경은

누구에게나 가슴 깊게 품은

곡선의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아 있다

 

길...

길게 뻗은 길은 유창하게 흐르지만

속도에 중독된 우리들의 길은

곡선 없이 직선으로만 끝없이 달린다

그러나 곡선의 굽이굽이엔

서러운 생채기가 남았다 해도

그 길엔 한 세상이 뚜렷하게 박혀 있다

길 떠난 이들의 불안과 초조와

그리움과 상처가 고여 있는 간이역

거기서부터 길은 다시 시작된다

 

세상은 숨 쉴 틈도 없이 너무 빨리 변해

미처 이별의 연습도 없다

역무원도 없이 낡은 의자엔

뽀얀 먼지만 간이역을 지키고 있다

만남과 헤어짐이 공존하던 플랫폼

이젠 상처의 기억 속에만

삶을 차곡차곡 쌓고 살아가는 우리들

작지만 꼭 필요했던 간이역

단 한 명이 기다려도 기차는 멈춰 섰지만

직선의 통로만 남아 있는 현실

지금 간이역이 추억 속으로 사라져간다

 

느림의 미학은 어디로 사라지고

사람과 속도를 위한 길이라지만 오히려

사람의 배여 없는 길만 남아 있다

간이역은 작아서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가파른 등성이에서 잠시 쉬었다가는

할머니 젖무덤 같이 포근하던

쉼터 같이 아늑한 곳이었다

무너져가는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곡선의 길 긴 인내의 끝이 이런건가

직선의 길 옆에 폐쇄된 간이역이 서 있다

 

속도의 길은 너무 빠르다

이 시대의 깊은 한숨소리를

사람들은 전혀 듣지 못 한다

기차는 모든 풍경을 받아낼 듯이 달리지만

풍경과 함께 할 여유로운 간이역이 없다

기차는 밀려나는 속도를 애써 외면한 채

젊은이들의 패기를 기죽이는 세상과

늙은이의 기다림을 저버리는 세상뿐이다

 

기차가 서지 않는 텅 빈 간이역에

오고가는 사람 없지만 키 작은 소나무 몇 그루

붉은 칸나꽃과 분꽃은 여전히 피어있다

사람들이 약속하지 않고 찾아가도

여전히 소박한 간이역은 그대로 남아있어

사람들은 길이 있는 한 떠날 생각을 한다

그것도 마지막으로 누려볼 호사(?)였던

완행열차가 서는 곳 간이역을 향해서...

 

어느 이른 아침 간이역 플랫폼에서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리며

홀로 서성여 본 기억이 있는가?

크고 넓기만 할 것 같은 세상살이

세상은 모두 직선으로 향해

마지막 곡선은 그리움으로만 남은 채

이제 원경마저도 시야에서 사라져 버리고

돌아가는 길과 느린 것들의 자린 어디인가

사라져버린 ‘비둘기호’처럼

느린 존재들은 점점 설 자리를 잃는다

 

천천히 가는 행보의 멋을 알고

아름다움에 머물러 음미하는 눈길

오늘도 어느 깊숙한 산골 간이역에서

오지 않는 기차를 기다려본다

직선보다 곡선의 아름다움을 기억하며

예전에도 그렇게 기다렸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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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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