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석만
문필서예가 림석만

평생 동안 주자를 존경하고 사숙했는데 옛터에 와서 보니 감회가 한량없다. 천 년의 시간을 뛰어넘은 제자의 몸으로 백세를 이룬 선생의 공을 감히 잊을 수 있으랴. 맑은 물은 굽이굽이 예와 같이 흐르고, 기암괴석은 높고 높아 서쪽이 동쪽과 같더라. 적도 물리치고 사도 물리치고자 고난을 다하셨건만, 지금의 기풍이 그때와 다른 것을 어찌할거나. 일반적으로 유교는 고리타분한 옛날의 윤리체계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보면 천 년 이상 우리 민족의 정신과 문화를 떠받쳐온 ‘보이지 않는 축대’였다. 
-원했던 학문- 본래 공부에 뜻이 있었으나 청소년시절 여건상 상급(?) 학교에 가지 못하는 바람에 한학을 공부하게 되었는데, 내가 학문을 하고자 할 때 우선 세계적 관점으로 바라보니 불교와 기독교, 유교가 있었다. 공자는 인간의 윤리를 중심으로 봤고, 예수 그리스도는 차등 없는 사랑을 말했으며, 석가모니는 세속과 인연을 끊는데서 공부가 시작되고 있었기에 세 분 다 성인이라 말할 수 있겠다.
유학에는 주자의 학문과 육왕(중국 송나라 시대의 상산 육구연과 명나라 양명 왕수인)의 학문이 있는데, 마음에서 이치를 찾자는 육왕보다는 성현의 도를 연마하고 힘써 실천하자는 주자에 더 마음이 끌렸음을 고백한다. 제 아무리 양심을 지키고 덕성을 높인다 해도 아는 것이 없으면 엄한 길로 가기 쉽기에 나는 주자를 쫓았다. 우리나라 주자학을 놓고 또 공부해보니 우암(송시열)의 학문이 바르고 컸으며, 따라서 우암 이후로는 학문적 연원에 대해 연연해하지 않았다. 
우암 이후 노론 안에서 호론이니 낙론이니 하며 갈라져 조선이 망할 때까지 그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차이를 따지고 보면 큰 것이 아닌데 같은 점에서 다른 점을 찾아보고, 다른 점에서 같은 점을 찾아보는 게 옳은 학문의 자세이지 어떻게 하나가 아니면 전부가 아니고 하나가 맞다고 전부가 맞다는 말인가? 이건 편벽함이다. 공부하면서 선생님의 말씀이라도 내가 생각해 맞지 않으면 따라가지 않았으며, 지금 함께 공부하는 도반에게도 늘 날 맹목적으로 추종하지 말고 자신의 생각과 글과 글씨를 스스로 판단해 열린 생각을 가지라고 말한다.
-실학- 당연히 실학도 필요하다. 의미만큼이나 경제도 중요하며 먹고사는 문제가 왜 안 중요하겠는가? 그러나 조선이 망한 이후로 우리나라가 몇 백배 발전하였지만 오늘날 사람의 의리는 너무 후퇴하였다. 노인들이 빈 방에서 홀로 죽고 가정은 파괴되어 자식들이 갈 곳을 잃고, 형제간의 우애도 많이 약해졌음을 인정하고 이제는 이런 점으로도 위정자가 눈길을 돌려야한다. 실리적 경제만 생각하다보면 부자로 살면서도 한없이 불행한 사람들만 늘어나지 않을까?
-유학의 본질- 유학의 기본은 한마디로 순리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모두가 암수가 있듯, 하늘의 이치는 음양이 서로 교합하여 자식을 낳고 기르라는 것이다. 짐승도 때가 되면 알아서 새끼를 낳고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제 새끼를 예뻐하지 않음인가? 부모가 그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나 짐승이나 매 한가지이니 이것이 하늘의 순리이며 순리의 시작은 부자유친, 나아가 오륜이다. 
유교는 순리 두 글자를 앞에 두고 시작 귀결된다. 바로 천리인데 틀어서 이야기하면 불교에서 무소유를 말한다. 말하고자 하는 뜻은 알겠으나 크게 보아 ‘두고 있는 바가 없다’는 것은 순리가 아니다. 교사는 자신의 직분에 ‘유소유’하고 상공인은 상공에, 군인은 국방에, 모두가 자기의 맡은 바 직분에서 최선을 다해 ‘이루고자 하는 바’가 있어야 하는 것이며, 유교는 자신으로부터 가까운데서 먼 곳으로 이치를 넓혀가며 실천하는 것이지 한 측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유학은 자연의 이치에 따르고 주어진 대상에 적합하게 살도록 가르친다. 과거에 상투 틀고 도포를 입었다고 오늘날에도 그것을 고집하는 것은 유학의 참된 정신이 아니며, 유건을 머리에 써도 행동이 그르면 유자가 아니고, 양복을 입어도 행동이 바르면 유자이다. 유학에 반대하는 이들도 유학이 말하는 순리의 이치를 무시해선 안 되며 현대인의 삶에 얼마든지 적용 가능한 것이 유학의 가르침이다.
-정치의 요체- 정치는 ‘바를 정’이요 ‘추스를 치’이다. 내가 먼저 바르고자 하는 것이 정(政)이고, 내가 바른 뒤에 남이 바로 서도록 추슬러주는 것이 치(治)다. 정치란 실이 헝클어져 있을 때 빗질을 해 제 가닥을 찾아주는 것과 같은 것이며, 나라의 질서를 실가닥처럼 가지런히 하여 국민들이 제각기 자기 직분에서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치이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를 보면 진보든 보수든 편벽한 태도가 잘못이며 자기 당색만 고집해서야 되겠는가. 상대방을 참작할 줄 알아야 하고 상하를 알고 선후배 예절을 아는 것은 주의주장을 떠나 기본이다.
-논어를 읽다- 평생을 유학 공부만 한 것은 아니어도 그동안 내가 읽은 책 중에서 사서오경이 다 훌륭하지만 그 중에서도 <논어>를 으뜸으로 꼽고 싶은데, 논어는 첫머리부터 끝까지 안 좋은 말이 없다.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불평하지 아니하고 이것이 군자가 아니겠는가? 논어는 누가 뭐라 해도 천하제일의 책이다.
-수신(修身)의 요체- 첫째는 마음을 가라앉혀야 하며 마음이 둥둥 떠 있으면 아무것도 못한다. 둘째는 앞서 깨친 사람들의 말씀을 귀담아들어야 하고 그런 연후에 배운 바를 부지런히 실천하려는 자세, 그것이 수신이다. 나는 함께 공부하는 도반들에게 “공부하기 전에 세 가지를 강조하는데 마음을 바로 잡아라, ‘바를 정(正)’자 한 자를 가슴 깊이 새겨라, ‘대지(大志)’를 가져라” 마음이 바르더라도 뜻이 크지 못하면 향리의 좋은 선비란 소리는 들을지언정 큰 사람은 못된다. 노력하라. 바른 마음으로 뜻을 이루고자 노력하고 또 노력하라. 사람들에게 큰 뜻을 품으라고 하면 으레 무슨 성인의 일처럼 아득하게 여기는데, 그렇게 마음먹는 자체가 스스로를 작게 만드는 것이며, 뜻이 작으면 장래가 보잘 것 없어지고 이루지 못하더라도 무릇 뜻은 커야 한다.
“뜻은 바르게 갖고, 그것을 이루고자 노력하며 사는 사람이 선비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거나 뜻이 작은 사람은 제대로 된 선비가 못된다. 아무리 인물이 좋고 벼슬이 높아도 마음이 바르지 못하면 한갓 작은 사람일 뿐이 아니던가?
함께 공부하는 도반에겐 내가 아는 것은 최대한 다 알려주려 했고, 선현의 소중한 글을 옮김에 내가 가진 얄팍한 지식을 아끼지 않았으며, 지금도 내 공부는 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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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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