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솔직히 말해서 조금은 건방진 이야기지만, 요즘 정치를 보면 함량 미달인 사람들이 있는데, 일일이 지적할 수도 없어 답답한 마음이다. 자연이 진공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권력도 공간을 허용하지 않는데 젊은 피의 리더들이 정치에 나설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건만, ‘내가 아니면 안돼’라는 그런 강박관념을 이쯤에서 버려야 한다.

물론 그들이 나이 들었다고 무시하는 것도 아니며 연륜과 경륜은 분명 지혜의 보배이지만 젊은이들이 움직일 수 있도록 서서히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는 것이 나의 작은 생각이다. 그것은 내가 아니어도 그 자리를 메꾸는 사람이 나타나기에 하는 말인데, 아침에 솟아오른 햇발은 저녁이면 스러지는 것이 이치이거늘 어찌 그것을 거역하려는가.

해가 한껏 늘어진다. 길어진 낮을 따라 한 해의 시작점인데, 일정을 다시 보며 지나온 시간과 남은 시간을 헤아리게 하는데, 아직 ‘한겻’은 아니지만, 한겻은 ‘한나절의 반쯤되는 동안’을 이르는 말로 하루 낮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여름 하루로 치면 햇발 엷어진 늦은 오후쯤? 그럴 때 둘러보면 세상의 음영이 완연 다르다. 버스에서 졸다 ‘눈을 뜬’ 경우라면 더 낯설겠다. ‘어디쯤이죠?’ 당혹스러운 두리번거림, 하지만 이 질문이 지상의 어느 곳에나 어느 때에만 나오는가. 그래도 ‘주저 없이 내려’ 걷는다면 ‘참 다행’의 작은 발견이다. ‘더 걸어야겠지’ 나설 마음이 있고, 나서면 또 다른 길도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니 한겻은 남아있는 시간 헤아리며 등을 세우는 때가 아닐까.

채소를 멀리하고 육고기만 탐하는 사람. 골고루 음식을 섭취해야 영양분도 고르거늘 한쪽으로만 치우친다면 어찌 되겠는가. 또한 행동에 옮기지도 않으면서 말로만 앞서는 사람. 그런 사람을 중용한다면 이 사회는 어찌 될 건지 불을 보듯 뻔한데, 공존의 법칙은 상대방이 수긍할 수 있는 선에서 마무리해야 하건만, 작금의 정치판에선 어찌된 것인지 협치는 실종되고 비방만 난무하는 꼴이란 눈뜨고 보기에는 정말 불쾌하다.

대통령께서 “공직 배제 5대 원칙”을 제시해 놓고 거기에 해당하는 사람은 절대 입각이 없다고 공헌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그것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겁박했던 모양이니 전임 정부와 무엇이 달랐던가. ‘논문표절, 위장전입, 음주운전, 세금포탈, 여성비하’ 안 걸린 사람이 있었던가. 그리하고도 ‘국민만 보고 간다’고 말하니 이런 괴변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진정성의 정치는 살아 있는가. 그들은 고민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정치꾼들의 마초 근성 틀에서 좌·우 어느 쪽도 한 발자국 내딛지 못하고 급변하는 세상을 무시한 채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연민의 정이 느껴질 뿐이다. 국가를, 국민을 생각한다면 보수와 진보를 따질 일인가.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제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세상을 열어 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있다”며 “선거 과정에서 했던 약속을 꼼꼼하게 챙기겠다”고 했다. 어느 정부나 초심(初心)은 결연하다. 역대 정부의 지지율 전강후약(前强後弱) 징크스를 끊을 수 있을지는 결국 일을 얼마나 제대로 하는지에 달려 있다. 두 눈 크게 뜨고 보고 있는데 그들만의 리그로 달리는 모습이란 한심하기만 하다.

어떤 일에서나 옳고 그름의 경계가 구분되는 일은 간단치 않다. 수많은 시행착오가 쌓였다가 흩어지고 다시 모이고서야 비로소 가능한 일인데, 강바닥을 흐르는 모래들이 자연의 이치대로 흐르고 쌓이며 경계를 만들어 가는 것을 보며 날마다 일희일비하는 삶을 돌아보게 된다. 천천히 이치대로 살아야 하는데, 끝나지 않은 일중에 지금 4대강이 몸살을 앓고 있다. 수십조 원을 쏟아 붇고도 강은 썩어가고 악취가 진동하는데, 그것뿐인가. 고기는 숨 쉬지 못하고 허연 배를 드러내고 있다.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대책이 없고, 흐르는 강을 보로 막아 녹조는 말할 수 없이 커져만 가는데, 정부와 환경단체는 양분되어 싸움질이다.

고스란히 피해보는 건 국민인데 아직까지도 해법 없는 시간이지만 과연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것인지.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진리이거늘, 그것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던가. 그리하고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대답도 없는 그대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 해결할 의지는 있는가?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눈앞의 이익을 보면 대의를 생각하고, 나라의 위태로움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인데,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지 않는다. 감히 말하면 우리가 조국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건지. 기득권자들은 자신의 안위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금의 상황을 바라보는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는 가슴이 아리다. 그거 아신다면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건만 강은 썩어가고 있는데 책상 놀음만 하고 있다는 것은 직무유기인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정치란 과연 무엇인가. 요즘의 정치 행태는 고집과 아집의 경계에서 차마 눈뜨고는 못 볼 광경인데, 진실을 앞에 두고 싸움질하는 그들에게 양심은 있는가 묻고 싶다. 바르게 살아야 원천이거늘 국민은 안중에도 없는 그들에게 솔직히 실망이라는 단어조차 호사스럽다. 정치를 예술처럼 샤프하게 할 순 없을까. 당리당략 정말 지겹다. 인정할 건 인정하면서 소통할 순 없는 것인지. 그렇게 못한다면 그 자리에서 폼 잡지 말고 내려오시라. 아직까지 양심 있는 정치인은 얼마든지 있는데, 그것을 안다면 지금의 정치 이건 아니다. 국민을 볼모로 하는 그런 정치 그만 하시라.

둘(dia) 사이의 말(logos)을 뜻하는 대화(dia-logue)는 그저 말을 주고받는다는 뜻이 아니다. ‘변증법(dialectic)’이라는 말이 대화에서 유래했듯 철학자는 대화를 통해 진리를 탐구했고 외교관들은 대화를 통해 전쟁을 막았다. 대화에도 순서가 있는데, 먼저 생각이 유사한 사람들끼리 대화를 통해 갈등을 조정할 줄 알아야 한다. 그게 정당이라면 먼저 당내에서 대화로 합의를 이뤄야 하고, 그걸 바탕으로 다른 당과도 현안을 풀어낼 수 있어야 한다.

책임 있는 집권 세력으로서 여당은 야당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하며 각종 문제를 해결하고 합의를 이끌어야 하고, 대통령은 자신의 지지층만 아니라 정부 정책에 반대하는 국민과도 대화해야 한다. CNN같은 외신을 통해서 대통령의 생각을 우회적으로 듣게 해서는 안 될 것이며, 정말 아쉬운 장면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답은 아주 간단하다. ‘소통’이다. 물론 쉽진 않지만 서로가 마음을 열고 다가가야 하며, 그것도 진정으로 국민을 생각한다면 지금 한가할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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