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은 흔들릴 때 비로소 살아 있음을 자각한다. 흔들릴 때마다 스스로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런 까닭에 흔들림은 살아 있음을 나타내는 징표다. 흔들릴 것이 없어 비어 있는 들판은 불모를 증거할 뿐이다. 비인 들판에 선 바람만이 서로를 애무하며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건데, 그 들판에 돌연 숨쉬고 있는 작은 삶이여. 흔들려 살아 있음을 증거하는 확실한 생의 흔적이여. 오늘도 흔들리는 바람과 만난다. 슬퍼하지 말자. 빈 들에서 비로소 바람결에 흔들리는 생을 발견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행복한가.

바람은 생기를 고취하면서도 삶을 몰수하는 힘의 표상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살아 흔들리는 모든 것은 이 운명을 피하지 못한다. 즉, 바람은 사물을 흔들어 생의 의혹을 고취하는 실체면서도, 폭력적으로 사물을 찢고 강탈하는 험악한 속성 탓에 잔악한 외압을 비유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고난은 바람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처럼 바람은 그것이 청신한 생의 감각을 고취하든 난폭하게 찢든 간에, 생을 좌우하는 원초적 감각인 것만은 분명하다.

비약하자면, 존재하는 것은 이제 바람 뿐인데, 사물은 바람 없이 미동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한편, 바람은 사물없이는 자신의 존재를 가시화하지 못하므로 그 역시 부재한다. 바람은 그 자체만으로 시각적인 확인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며, 곧 ‘있는 것은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역설이다.

본래 바람은 폭압적 위세와 차고 서늘한 기운 탓에 부정적 속성을 환기하지만, 이처럼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속성 때문에 무(無)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것은 도저한 미완성이기도 하고, 정신적 공허를 채우는 반어적 형식의 내적 충만이기도 하다. 바람이 몰고 오는 기묘한 괴로움과 절망의 그물망에서 인간은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자탄에 이르면 바람은 통곡이다. 역설적이게도 그렇다면 지금 바람은 있는 것일까?

삶은 견딜 수 없이 부박하고 치졸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그 가증스런 세상과 늘 만나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치욕이다. 추악한 세상, 부조리한 현실에 침을 뱉으면서도 그로부터 탈퇴하거나 초월할 수 없다는 점에서 지금 우울하다. 무기력한 절망과 가속되는 파괴적 충동은 급기야 세상으로부터 고립 아닌 고립의 형태로, 황폐한 내면 깊숙이 이어진다.

영혼마저 잠들지 못하게 하고 육체를 감금하고 억압하는 실체는 대체 무엇인가? 왜 이토록 고통스럽게 하나의 주제에 집착 하는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고 도사린 억압적 실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실제적으로 억압구조는 삶의 전역에 사악하게 은폐된 채 만연해 있으므로 쉽게 포착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정치 사회 제도 속에 내재되어 인간을 조종하고 억압하거나 인간 개개인의 마음속에 증오와 미움으로 숨어 있곤 한다. 푸코의 말을 빌리자면 ‘사회 전체가 하나의 감옥’인 셈이다.

이 시대를 살면서 어느 누가 절망과 무관할 수 있으며 어느 누가 광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단 말인가. 세계에 대한 합리적인 이해와 설명이 불가능한 지금 그것은 더욱 심각하다. 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정당한 이해마저 조롱당할 때 인간의 조건은 과연 무엇인가. 급변하는 세계 정서 속에서 세계를 통찰하기란 불가능하며, 세계는 그저 위압적으로 존재할 뿐이라는 사실에 직면했을 때처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세계에 대한 이해를 거부당하면, 인간과 세계는 영원히 불화한다. 세계를 분석하고 정립하려는 인간의 합리적 욕구와 이를 가로막는 세계와의 대치상태는 불안하다. 소위 ‘부조리’하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렇게 세계가 충돌한다면, 세계와 인간과의 합리적인 연관이 허망한 것이라면, 세계와 인간은 모두,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아니, 무의미하다. 설사 심오한 의미를 갖는다고 해도 그것을 간파할 능력을 상실하는데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인간은 다만 이렇게 부조리한 상황 속에 방치되고 의식을 조종당할 뿐이다.

세계에 대한 합리적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이 생성한 악에 의해 세계가 구성됐고 그 세계가 인간을 억압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참 불행하다. 인간이 자초한 악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이 보이지 않는 권력의 부메랑으로 선회하여 자신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아이러니다. 따라서 아무리 저항하고 반항해도 그 어떤 선택도 무의미하다.

이는 ‘고도’를 기약하며 기다림을 인내하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지루하고도 반복적인 일상과 유사하다. 불확실하고 부조리한 세계를 감내하는 유일한 행위는 고도에 대한 기다림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희망이면서도 절망인, 알 수 없는 그 무엇을 기다린다는 행위에서 실존을 찾는다니, 연민이 느껴지지 않는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이 속수무책이여.

‘무의미한 반복의 일상에서 오히려 미치지 않는 것이 더 큰 고통이다’라는 수사는 현대의 위기상황이 인간의 의식을 철저히 불구화하고 파편화한다는 증거다. 더구나 우리의 참혹한 현대사는 모순의 역사적 전개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것은 치욕이다. 뒤틀리고 찢긴 육체로 다리를 절며 쫓겨 가던 시기, 암울했었다. 캄캄한 들녘에서 홀로 숨죽이며 포효하다가 무릎과 정수리에 커다란 대못이 박히고 쓰러지던 시기, 정말 암울했었다. 숨통을 막고 칠통같은 지하의 시대 속으로 명멸해간 학살의 시기, 암울했었다. 그러나 잔인한 세상이 역설적으로 글과 글씨의 생존을 가능케 했으니 이는 비극적 아이러니다.

어둠이 깊으면 깊을수록 새벽은 가깝다. 안개가 숨을 멎게 하고 성대마저 짓이겨 구원의 소리마저 암흑에 묻혔던 시기, 찢겨진 육신이지만 희망마저 포기할 순 없었다. 피로 물든 육신과 혼미한 정신은 폭압적인 상황이 거세고 포악할수록 오히려 빛났다. 명멸하는 빛에서 찰나적 희망을 발견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구원이고 해방이다.

그래도 삶은 이어지며, 치욕스런 현실이나 단결된 희망만이 우리, 우리를 구원하며, 모든 인간에게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다. 희망은 참혹한 상황을 주체적으로 극복할 때 의미가 있다. 대지를 집념처럼 움켜쥐고 열린 공간을 향해 손을 내밀며 침묵으로 다져진 묵시론적 의지가 희망마저 간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어찌 하겠는가.

비록 쓰러질 듯 초라한 누옥일지라도 권력과 물욕을 경계하고 자연을 벗삼으며 세상의 번잡함과 추잡함에서 벗어나 은거하면서 바람처럼 종횡무진하는 정신의 자유로움을 누리고 싶은데 아직 그것은 보이질 않고, ‘허(虛)’, ‘빈 충만함’은 현상적인 차원에서는 불가능하지만 정신적 차원에서는 충분히 가능하리라. ‘있음’으로 없음과 ‘없음’으로 있음의 미학, 즉 소유하지 않는 것이 소유하는 것이라는 “무소유의 자유”를 역설적으로 강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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