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얼마쯤 왔을까, 정확히 아스팔트 길이 끊어지고 잿빛 갯벌을 드러낸 바다가 보이면서 완행버스는 뒤흔들립니다. 여기부터가 농사짓고 뱃일 하면서 사는 사람의 마음으로 들어서는 충남 태안 원북면 신두리 문턱이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스치며 잠시 ‘불편’이라는 단어가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이 정도 불편함은 감수해야 하겠지요. 흔들거리며 가는 길의 불편함, 가끔씩 오고 일찌감치 끊기는 버스편의 불편함, 그런 생각 때문이기라도 하듯 버스는 더욱 흔들립니다. 그런데 훤히 뚫리지 않은 길이 답답하게 느껴지다가도 정겨운 느낌이 드는 건 무슨 이유일까요.

남들이 더 편한 삶을 찾아 떠나갔던 길을 거꾸로 들어가는 기분은 정말 묘합니다. 그러면서도 펼쳐지는 농어촌의 풍경은 언제 보아도 그저 욕심내고픈 아름다움인데, 한 모퉁이를 돌면 몇 채의 집이 있고 밭과 논이 펼쳐집니다. 마치 나뭇가지가 가지를 뻗듯 반복되는 풍경, 하지만 버스에서 내려 모랫길을 한참 걸으면 이 세상에서 제일 깨끗하고 아름답게 속살 드러낸 바다가 보이고, 다시 한참을 걸으면 드디어 순수하게 넓은 가슴을 펼쳐 보이면서 수줍은 듯 편한 몸짓으로 나를 반겨주는 곳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가 바로 신두리 모래 언덕입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모래 언덕이라는 이름 보다는 오늘은 ‘당신’이라는 이름을 쓰려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자연환경이 인간에게 미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위대하기 때문입니다.

먼 길은 그리움에 의해 ‘움직이는 길’이 됩니다.

나를 실어다 주는 길이 아니라 나에 의해 숨쉬고 꿈틀대는, 슬퍼하고 즐거워하며 움직이는 길이 됩니다. 또 그리움이란 것이 현실에서 빚어지는 것이라면, 그 빚어짐 속에서 먼 길 점점 구체화·정교화되는 것이라면 결국 ‘먼 길’은 내 마음의 길입니다. 내 마음 속에서 자라 내 마음을 아는, 때문에 나를 가장 편안하게 해주는 길입니다. 오늘 당신을 만나기 위해 내 눈을 현란케 하는 길이 아니라 내 몸을 편안하게 해주는 길입니다. 그래서 그저 ‘그래야겠다는 마음’에서 나선 길이 이처럼 편안한 것은 그 길이 모르긴 몰라도 불편한 내 삶 속에서 어느 정도는 모양이 만들어져 가던 길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는’ 수단이 아니라 그것이 나인 길, 그래서 여기와 저기, 나와 당신을 동시에 숨쉬게 하는 길, 문득 그런 길에 대한 갈급증이 생겼습니다.

당신만 생각하면, 어디 한군데 변변히 내세울 것 없는 내 마음에, 길이 곧 나이고 당신일 수 있는, 여기이고 저기일 수 있는, 그래서 ‘내 안에, 문득, 그런 길이 아니라면’ 내 생의 노력이 당신에게 다다를 수 없을 것이라는 무서움이 생겼고, 또 당신을 향해 있다고 믿는 나도 거짓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섬광처럼 스쳤습니다.

생각해 보면, 여태껏 내 생의 길이란 것은 어떤 목표를 향해 내 생각을 실현시키는 수단으로만, ‘무엇으로 가는 길’이라는 이름에서만 있었습니다. 마치 고속도로와 같이 목표만 있는 길이며, 그래서 효율성 이외의 가치를 상실해 버린 길입니다. 타인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가는 길이 아니었고, 오직 효율성만이 지배하는, 분명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리라 마음먹었음에도 내 뜻과 달리 나는 늘 길에 흘려 있는 사람이 되곤 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길은 더 이상 수단일 수 없습니다.

오늘 나는 당신의 가슴 한복판으로 깊게 패인 주름진 길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먼 길은 주어지는 길이 아니며, 먼 길은 당신으로부터 피어나는 길입니다. 여기에서, 서로의 아픔에 마음을 기울여 주는 데서 만들어지는 길이 아니라 ‘함께 가는’ 속에서 만들어지는 길입니다. 저기와 여기에 동시에 만들어지는, ‘저기는 여기’의 합명으로 주어지는 길이었으며, 그래서 나는 가슴을 칠 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당신은 알고 있나요.

당신을 만나러 갈 때마다 내가 들에 핀 야생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다름 아닌 내 속의 교만을 다스리고자 함입니다. 화려한 꽃을 피우는 야생초라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렇게 소박할 수가 없는데, 자연 속에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있을지언정 남을 우습게 보는 교만은 없습니다. 우리 인간만이 생존 경쟁을 넘어서 남을 무시하고 제 잘난 맛에 빠져 자연의 향기를 잃고 있습니다만 남과 나를 비교해 나만이 옳고 잘났다며 재는 인간들은 크건 작건, 잘생겼든 못생겼든 타고난 제 모습의 꽃만 피워내는 야생화로부터 배워야할 것이 많습니다.

평화란 절대적 평온, 정지, 무사, 고요의 상태가 아니라 내부적으로 부단히 움직이고 사고하는 동적평형(動的平衡) 상태입니다. 사회가 평화롭다. 두 사람 사이가 평화롭다고 하는 것은 내부적으로 부단히 교류가 이어지고 대화가 진행되어 신진대사가 잘 되고 있다는 뜻이 됩니다. 화단 구석에 수줍은 듯 얌전히 피어 있는 작은 꽃을 보면서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저 작은 꽃을 피워 내기 위하여, 화단 구석의 내밀한 공간 속에 의젓하게 자리하기 위해 쉼 없이 움직이고 있는 꽃잎의 내면을 그려봅니다.

인간만이 만물을 지배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신도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생각 했지만, 내가 먼저 있고 남은 그 다음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으며,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생명도, 이 우주와 자연의 일부였고, 어릴 적 성경 경전을 밀어 놓고 노자와 장자 경전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도 자연의 이치를 위해서라고 할까요. 내가 선택한 배교의 보상은 의외로 컸습니다. 사실 나는 무슨 주의자임을 거부합니다.

현실은 흐르는 것이므로 생각도 흘러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결국,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그것이 화두로 남습니다만 자연의 흐름을 따라 사는 것이 최선이라는 생각입니다. 어떤 일이 이뤄질 때 인간의 의지가 기여하는 부분은 작고 미약합니다. 산다는 것은 결국 ‘흐름’을 읽는 것이고, 그것은 나를 버릴 때 가능한 거죠. 이 가을 당신을 보면서 이걸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신두리에서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당신을 보러 갔다가 당신은 놔두고 날이 저물어 모래 한 움큼 만지작거리면서. 나의 생은 빈손으로 돌아오고 이제야 당신은 ‘자유 아닌 아름다운 구속’으로 ‘자유’를 찾았습니다. 내 빈손으로 말미암아 당신의 얼굴이 비로소 나를 밝힙니다. 나는 점점 어두워지고, 어두워져 당신 얼굴 밝아지나니, 이제 나는 빈손이고자 합니다.

내 생의 목표는 소유였습니다. 당신을 차지(?)하기 위해, 당신이 좋아할 것을 상상하여 그렇게 당신을 찾아다니면서 하나씩 나의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서 비로소 나는 깨달았습니다. 얻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는 사실을. 비움만이 영원히 얻는 길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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