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30년 가까이 내륙과 섬을 이어 주던 안면 연육교가 건설 된지 오래되어 위험한 상태에 이르자 관계 당국에서는 고심 끝에 새로운 교량을 만들게 되었는데, 그것이 1997년 5월이었습니다. 새로운 교량을 안면대교(安眠大橋)로 이름 짓고 동판글씨로 넣어 영구히 보존하기로 하고 그 글씨를 제가 쓰게 되었으니 운이 좋았다고나 할까요. 그러나 안면도를 드나들 때 다리 양쪽 끝에 붙어 있는 글씨를 보면서 지체(?) 높은 사람들이 제 글씨를 넣는 것에 대해 찬성과 반대로 양분됐던 것을 생각해 봅니다.

앞머리부터 쓸데없는 글로 말이 이어졌습니다만 그래도 제가 사랑하는 안면도 땅, 그것도 솔숲에 앉아 있으려니 지난 일이 떠올라서 적어본겁니다. 이제는 지난 모든 것을 잊고 솔숲으로 들어가 아름다운 향취를 보렵니다.

안면도는 태안반도의 남쪽으로 길게 뻗은 섬입니다. 안면대교를 건너서 섬으로 들어가면 섬의 한가운데를 통과하는 77번 지방도를 따라서 섬의 남쪽 끝인 고남면 영목 포구까지 안면도입니다. 안면대교를 건너면 창기리, 정당리, 승언리, 중장리 마을의 산과 들에 장엄하게 소나무 숲이 펼쳐지는데, 소나무 숲을 만나면 포장도로를 버리고 숲길로 들어서야 제 맛이 납니다.

안면도의 소나무 숲은 마을의 숲이며, 대문 밖이 숲이고, 밭이 끝나는 곳도 숲이고, 울타리 너머가 숲입니다. 숲의 신성을 누가 어떻게 말해도 여기에서 숲의 신성은 멀고 우뚝한 것이 아니라 가깝고 친밀해서 사람의 숨결을 따라 몸속으로 스미는 것임을 안면도 숲 속에서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안면도 소나무 숲은 혈통 좋은 소나무들이 우뚝우뚝하고 듬성듬성하게 들어서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가 저절로 나오게 합니다. 이것이 우리 태안에 있는 거죠.

추사(秋史) 선생은 <세한도(歲寒圖)> 발문에서 “겨울이 깊어진 뒤에야 소나무, 잣나무의 우뚝함을 안다”는 공자의 말을 인용했지만, 이것은 사실 소나무에게 좀 심한 말인 듯 싶습니다. 그 말은 소나무의 우뚝함에 바쳐진 말이 아니라 그 말을 하는 사람 내면의 가파름에 바쳐진 말처럼 들립니다. 그래서 엄밀히 말하면 <세한도> 속의 나무는 소나무도 잣나무도 아니고,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의 마음속 나무일뿐입니다. 그 나무는 가파른 이념의 힘으로 이 세계와 불화를 뚫고 솟아오르는 정신의 나무이며, 그 나무는 우뚝한 높이만큼 불우합니다.

이곳 숲에서는 도시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그 어느 것도 없습니다. 오로지 오솔길, 약수터, 청설모, 철새들이 머무는 저수지, 밤하늘의 쏟아질 듯 많은 별들, 사위가 온통 칠흑 같은 밤, 숲머리를 밟고 지나가는 무시무시한 밤바람, 메마른 밤의 허공에 울려 퍼지는 산짐승들의 울음소리뿐, 밑창이 너덜거리도록 무참해진 삶을 끌어안고 그 삶과, 문명의 저 변방으로 흘러 와버린 자의 앞에 놓인 확고부동한 수많은 내일들 사이에서 버성기는 우울을 견디다 못해 주저앉고 싶은 남자에겐 외롭다는 말조차 입술에 얹기가 송구스러웠습니다.

봄의 안면도에는 겨울을 다 지난 뒤에도 소나무의 아름다움을 알 수 있습니다. 곧고, 높고, 힘센 나무들이 자존(自尊)의 거리를 정확히 유지하면서 숲을 이루어, 나무들의 개별성은 숲의 전체성 속에 파묻히지 않습니다. 안면도의 소나무는 붉고 곧은 기둥을 높이 올려 가다가 맨 꼭대기 부분에서만 가지가 퍼지고 잎이 돋아나며, 결코 아무데서나 가지를 뻗어 늘어뜨리지 않습니다.

그 소나무들은 음풍 농월의 충동과는 거리가 멀며, 소나무들은 경건하고도 단정합니다. 그러하기에 안면도 소나무는 자세히 봐야 하는데, 밑둥의 껍질은 검고 두텁지만, 사람의 키를 넘는 높이부터는 껍질이 얇아져 종이 한 장을 바른 정도이고, 거기서부터 나무의 붉은 색이 찬란하게 드러납니다. 이 붉은 색은 빛을 내뿜는 색이 아니라 빛을 나무의 안쪽으로 끌어들여 숨기려는 붉은 색인 거죠. 그래서 안면도 소나무 숲 속에서는 앞을 바라보면 붉은 숲이고, 위를 쳐다보면 푸른 숲입니다. 봄의 소나무 숲은 다른 활엽수림의 신록처럼 화사하지도 않고 들떠 있지도 않습니다. 봄의 소나무 숲은 겨울을 견뎌 낸 그 완강한 푸르름으로 진중하고도 깊게 푸르며, 그래서 안면도의 소나무에는 안면송(安眠松)이라는 고유명사가 있습니다.

이 소나무들은 <세한도> 속의 소나무처럼 이념화한 불우의 그림자가 없고 산전수전의 귀기가 없습니다. 나무 꼭대기에 퍼진 잎들을 멀리서 보면 가지를 떠나서 날아갈 듯한 구름 조각으로 떠있습니다. 안면도의 소나무들은 과도한 풍요와 표정을 안으로 다스려 가면서, 높고 곧고 푸르기에, 안면도에서는 하루 종일 다녀 보아도 이처럼 잘생긴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습니다. 여기에 봄비라도 내리면, 젖은 숲은 젖은 향기를 품어 내는데, 숲의 신성은 마을 가까이에 있고 사람의 마음속에 있습니다.

여름의 안면도 소나무 숲은 어둑신하고 서늘합니다. 숲속에서, 빛은 사람을 찌를 듯이 달려듭니다. 나뭇잎 사이로 걸러지는 빛은 세상을 온통 드러내는 폭로의 힘을 버리고 유순하게도 대기 속으로 스며드는데, 숲속에서 빛은 밝음과 어둠의 구획을 쓰다듬어서 녹여버립니다. 그래서 숲속의 키 큰 나무들은 그림자도 없이 우뚝우뚝 홀로 서 있고, 스며서 쓰다듬는 빛이 나무와 나무 사이에 가득 내려 쌓여 숲은 서늘한 음영에 잠기는 거죠. 또한 안면도 숲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숲의 빛은 물러서듯이 멀어지고, 멀어지면서 또 깊어져서 사람들은 더 먼 빛 속으로 자꾸만 빨려 들어갑니다.

저는 안면도에 머물 때 마다 여름날의 흰 새벽을 사랑합니다. 나무들은 새벽의 푸르름 속에서 보병(步兵)들처럼 직립해 있는데, 어디론가 끝간데 없이 뻗어있는 길들은 제 새벽 산책의 여로입니다. 일찍 깨어난 작은 새들이 포르릉 거리며 길 없는 공중의 길로 날아가고, 이슬이 맺힌 풀섶을 스친 제 바짓가랑이는 축축하게 젖는데, 그 물빛처럼 투명한 시간에, 제가 지나온 삶의 여정들에 대한 성찰이 이루어집니다.

저는 제 앞에 놓여 졌던 수없이 많은 길들 중에서 단 하나만을 선택함으로써, 선택에서 제외한 다른 많은 길들은 지워 버렸습니다. 제가 선택하지 않은 길, 그리하여 제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제가 선택한 길이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제가 선택하지 않은 다른 길들이 만들어 낸 의미라는 뜻입니다. 한 달 전 저의 부주의로 다리 한 쪽 발목 아래가 골절되어 서울에서 수술을 받고 내려와 아직도 걷지 못하지만, 버스로 안면도에 온김에 다른 생각 없이 “솔숲의 섬. 안면도”에서 오늘 생각한 것을 글로 옮겼습니다.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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