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만나면 헤어지고, 살아있으면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원수(怨讐)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고, 죄(罪)짓고는 못산다고 했는지 모른다.

우리가 살다보면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이런 저런 사정으로 헤어진다. 농경사회와는 달리 문명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개인사정과 주위 환경을 못 이겨 헤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잘 있거라/나는 간다./이별의 말도 없이(후략)라는 ‘대전발 0시 50분’과 /잘 있거라/아우들아/정든 교실아(후략)라는 초등학교 졸업식 노랫말이 사정 따라 말없이 떠남과 신입구출(新入舊出)의 현실을 말하고 있다.

6월말로 32년의 공직을 접은 맹천호 서기관을 보면서 하는 말이다. 맹 실장의 사무실에는 선배님의 뜻을 잊지 않겠다는 후배들의 글귀가 필자의 발길을 멈추게 했다. 맹 실장은 태안군이 복군 되던 1989년 이립(而立)의 문턱인 29세에 9급으로 시작한 32년 공직생활이 4급 서기관으로 정년을 한다.

백화산도 단숨에 뛰어넘을 혈기성왕 했던 29세에 시작한 공직이 이제는 반(半)백(百)의 나이를 넘어 이순(耳順)의 문턱에서 서성이는 나이가 됐다.

지난 32년을 돌아보면 보람도 많고, 가슴에 묻을 것도 있을 것이다. 또 태안 구석구석에 뿌린 씨가 자라 보람을 느끼는 것도 많고, 나도 모르게 떨어진 씨가 자라 지역을 지키는 버팀목도 많을 것이다.

또 칭찬이 변해 질책(叱責)이 되고, 네가 울어야 내가 웃는 선거판처럼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 칼을 가는 구밀복검(口蜜腹劍)에 만감이 교차(交叉)할 것이다.

맹 서기관의 공직계기는 남달랐다. 제대 후 특별한 기술과 배경이 없어 미래를 담보할 직장 찾기가 쉽지 않아 고민하던 중, 부대 선임병의 조언이 생각나 7급 공채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그러던 1989.6.27. 태안군 복군 공채 1기 24명 모집에 합격해 32년의 공직생활을 끝내고 공직에서 쌓은 경험으로 제2의 인생을 준비한다고 한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의 과거는 비참할수록 빛이 나는지 모른다.

공직생활 중의 보람을 태안군 복군을 전국에 알린 것을 꼽았다. 2002년 6급의 첫 임지인 고남면은 안면도 꽃박람회를 보기위해 대천에서 안면읍 꽃지를 찾는 관광객들에 말품을 팔아 알렸다고 했다.

태안의 남단인 영목까지 오가는 관광객을 위해 길가의 까나리 액젓 통을 정리해 꽃동산을 만들어 꽃박람회를 성황리에 끝낼 수 있게 했다. 지금도 봄철이 되면 길가에 만개(滿開)한 벚꽃을 보면 당시 주민들과 고락(苦樂)을 함께한 3년여 동안의 흘린 땀을 보람으로 느낀다고 했다.

특히 2013년 제13회 바다의 날 행사준비는 군(郡)에서 주최하기는 버거운 행사였다. 그러나 뜻이 있으면 길이 보인다는 일념으로 만리포해수욕장 장벌에 사상(沙上)무대를 설치해 행사를 무사히 끝냈다. 행사 후에 만리포의 모래알만큼이나 많은 칭찬을 받은 것은 평생의 보람이라고 했다.

무대가 떠내려가지 않을까 노심초사 하며 새벽에 물때를 보러 나가야 하는 고생도 많았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함께한 동료들이 고맙고 그립다며 눈시울을 붉히며 겸연쩍은 웃음을 웃었다. 특히 2007년 12. 7. 허베이 스피리트호 기름유출사건은 군민과 자원봉사들로 이룬 기적은 태안군 지역사에 영원히 남을 것이라며 말문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보였다.

특히 피해복구에 따른 정부매뉴얼이 없는 상황에서 피해민들의 생계비와 방제비 지원을 위한 매뉴얼을 만들어 도내 시·군 간과 군내 8개 읍·면의 조정행정은 지금도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많은 고락(苦樂)중에 문대통령이 참석하는 유류피해극복 10주년행사장인 만리포의 고생은 말로는 다할 수 없다고 했다. 대통령 앞에서 태안을 자원봉사자 희망의 성지로 천명했다. 그러나 123만 자원봉사자들의 숭고한 뜻이 왜곡돼, 정부와 전국자원봉사자협의회를 비롯한 관계단체를 수차례 방문하고 설득해 얻은 결과였다고 했다...

당시 유류피해대책지원총괄업무 책임자로서의 바람은 피해민들의 피와 땀인 출연금이 본래의 목적과 취지대로 사용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또 공무원의 소임을 다할 수 있었던 것은 이장님들과 사회단체장님들 또 지역원로분의 편달 덕분으로 돌리는 겸손을 보였다.

주로 기획, 예산, 행정, 경리 등 회계분야에서 근무하다보니 군민과의 소통 기회가 부족해 항상 아쉬움이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새마을팀장과 행정지원과장을 하면서 새마을단체와 바르게살기협의회, 주민자치협의회 또 188개리 이장님들과의 소통으로 군정을 할 수 있었으며 사회에서도 힘이 된다고 했다.

특히2018년 주민복지과장이 재충전의 기회가 됐다고 했다. 생로병사를 지원하는 주민복지과는 임신부터 영유아, 어린이, 청소년, 노인, 장애로 도움이 필요한 분들... 또 영묘까지 보살핌을 큰 보람으로 느꼈고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려고 노력 했다며 눈시울을 붉히는 것으로 그간의 고생을 못 잊는 듯 했다.

지금도 가세로 군수님의 주요시책인 주민복지업무는 다시 태어난 느낌이라고 보고한 것이 생각나고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고 했다. 또 이장 직선제 추진은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풀뿌리 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 강조했다.

저희 장형께서도 수년간 지도자와 이장으로 봉사했다며 이장 직선제는 변화의 시점으로 봐야한다고 했다.

또 태안군이 외국과 교류를 위해 문호를 연 것은 1997년 윤형상 군수님을 모시고 중국 산동성 태안시와 자매결연이 효시였다고 했다.

대외교류의 첫발은 공항에도 첫발. 비행기탑승도 처음이라 긴장과 실수가 많았다고 했다. 그러나 끝없이 펼쳐진 대륙에 북경의 천안문광장과, 자금성의 건축물들을 보고 세상은 넓고 크다는 것을 느끼며 많은 생각을 했다고 했다.

이를 계기로 지난 복군 30년 행사에 중국 태안시 방문단이 참석해 태안군을 대외적으로 알렸다고 했다.

또 초고속 승진이라는 소문에는 관운(官運)인 것 같다는 겸손을 보였다. 24명동기 중에 전출과 퇴직으로 6급 승진과 5급 사무관, 4급 서기관까지 첫 번째로 기회가 온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특히 잊혀지지 않는 것은 1989년 29살 늦은 나이에 9급으로 시작했지만 충청남도에서 주관하는 도내 170명 신규후보자반 교육에서 1등을 했고, 당시 군수님께서 복군 후 첫 번째로 도지사 표창을 받아 왔다고 기뻐하며 격려 해주신 것이라고 했다.

맹 실장은 공직생활을 하면서 1등했다는 자부심에 먹칠하고 싶지 않아 매사에 분발했다며 앞에서 끌어준 선배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공직을 끝내는 맹 실장이 6개월의 공로연수 중 생각난 것이 있었다면 ‘공직’이라는 울타리의 소중함이었을 것이다.

또 사회가 인정하고 나와 가정을 안전하게 지켜주며 노력한 만큼 보람을 찾는 소중한 직장임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어느 업무를 담당하느냐 보다는 능력을 키우는 공직자가 필요함을 알았을 것이다.

어느 언론인의 칼럼처럼 민원인과는 친구가 되라 했듯 민원인을 부모형제나 친구 대하듯 하면 얼굴 붉히는 일은 없다고 했다. 또 후배들은 군민과 군정에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자신감을 갖고 열정을 쏟아 주었으며 좋겠다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공직을 떠나는 맹천호 실장의 아우들은 고락을 같이한 후배 공직자들이고, 선생님은 정(正)부(副)군수를 포함한 군민들일 것이다. 맹 실장의 손때가 묻은 집기들과 담장 옆에 숨어사는 잡초, 또 태안군을 밝히는 전신주들도 맹천호 실장의 체취(體臭)와 발자국 소리를 오래 오래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태안의 영산 백화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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