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에덴은 어디에도 없다...

태초부터 경쟁이 있었을 뿐

 

한적한 바닷가. 모딜리아니의 그림을 닮은 길쭉하고, 신비스런 그녀와 소주를 마시고 우린 밤바다를 유희했다. 그녀는 온전히 마음을 열지 않았지만 그때 보았던 하늘의 그 별빛만큼은 지금도 잊혀지질 않는데, 첫사랑은 덧없이 사라지는 ‘찰나’다. 마치 낙인처럼 가슴 속에 담아 두려는 첫사랑은 실은 잊어야 할 목록이며, 몰래 추억을 보관하는 ‘첫사랑 표본실’이야말로 위험한 기억인자여서 훗날 사랑을 잡고, 사람을 잡는다. 긴 세월동안 가슴에 불을 댕기는 풋풋한 첫사랑이지만 이젠 지워야 할 때가 아닐까? 나보다 힘들고 더 어려운 시절을 겪어낸 분들에게 정말 죄송한 이야기지만 나는 내 딴에는 아플 만큼 아파봤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흔들리고 아파해야 할 일이 많은 모양이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며, 때로는 뿌리까지 흔들릴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상처들이 나를 향기롭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 인생 마라톤 42.195km에서 다시 오르막을 가고 있는 중이며 정확히 보면 체력이 빠지는 25km 지점인 듯하다. 속도가 떨어져 내내 가쁜 숨을 내뱉는 이 무거운 삶의 레이스에서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없었다면 어찌됐을까. 생각해보면 아찔하기만 한데, 내 힘은 피붙이이며 그나마 딸과 아들은 희망이다. 풀잎으로도 꽃으로도 사람을 때려서는 안 된다는 신념으로 살아갈 것이며, 고운 마음으로 계획된 일이 마쳐지면 술 한 잔 마시련다. 최고 부자가 된 기분으로...

 

‘피로사회 비판’ ‘휴식 행복’이 요즈음의 키워드라고 말해도 다르지 않겠다. 그러나 그에 대한 반격은 강력하다. 뇌과학·진화인류학·행동경제학의 박학다식이 아니더라도 이 땅에 ‘행복전도사들’이 있기나 할까. ‘에덴주의’라는 미명하에 뜬구름 잡기나 사탕발림으로 사람들을 섣불리 위안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기에 하는 말인데, 에덴주의자들의 메시지는 한마디로 이렇다. ‘미친 무한경쟁을 중단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 이들은 현대인을 ‘쾌락의 러닝머신’ 위에서 끝없이 질주하는 신세라 동정하고, 경쟁이야말로 우리 영혼을 갉아먹는 암적 존재라 질타한다. 경쟁을 동력 삼는 자유시장과 자본주의는 인류의 새로운 원죄로 내몰리는 건데, 이런 문명비판론은 가만히 살펴보면 내력이 있다. 1700년대 루소는 문명이 자연 상태 인류의 본성을 타락시켰다고 탄식했다.

 

하지만 다 낭만적인 허구다. 인류학연구 성과를 보면 야생은 비참했고 인류는 인정사정없는 지상의 삶과 포식자들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분투해야 했던 거다. 자연의 출발점은 돌이켜보면 가난이었고 경쟁은 삶의 숙명이자 조건이었다. 에덴주의자들은 경쟁이 불평등을 낳았다고 하지만 경쟁시대 이후에야 생필품 값은 사상 최저로 내려갔다. 어디 그뿐인가. 평균 수명은 지난 150년 사이 2배 이상 늘어났고, 따지고 보면 팽팽한 경쟁과 긴장감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뇌를 보면 분명한데, 사랑, 새로운 지식, 부와 지위, 무엇이든 맹렬히 추구할 때 도파민(쾌락신경전달물질)이 분비하는 거다. 인간은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뭔가를 성취하려 하는데, 아이들을 공중에 띄워보면 알 수 있듯이, 처음엔 떨다가도 짜릿함에 웃음을 준다. 걸음마를 시작한 아이들도 쉴 새 없이 모험에 나서는데, 보행기에도 가짜 운전대를 달아주는 이유가 그런 거다.

 

새 일에 대한 야심이 없으면 뇌세포도 시들해진다. 미국·덴마크의 60대 초 남자들은 50대 초 남자보다 3분의 1정도 일을 더하고, 프랑스·오스트리아에서는 80~90%가량 일을 덜 한다. 그러나 인지능력을 비교했더니 미국·덴마크보다 오스트리아·프랑스 쪽이 2배 이상 낮았다는 연구도 있다.

 

세상에 경쟁 없는 체제는 없다. 옛 소련 공산체제에서도 시민들은 식권과 아파트를 두고 피터지는 경쟁이 치열했고 문화혁명 때도 암투가 난무했다. 불평등이나 위계는 경쟁체제 이전부터 있었는데, 오히려 경쟁이 낳은 위계가 정직함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고 승패는 바뀔 수 있는데, 그 결과 더 나은 것을 꿈꾸게 하는 거다.

 

행복전도사들이 혐오하는 경쟁 스트레스도 인생에서 ‘맛소금’같은 것인데, 우리는 놀이조차 경쟁을 즐긴다. 룰과 승패가 분명한 스포츠에 열광하는 것, 팀워크도 동지애도 경쟁의 상황에서 나오는 거다. 생전에 앨범 판매 수익만도 넉넉했던 그 유명한 프랭크 시내트라가 부담스러운 라이브 공연을 계속한 것도 무대 위 긴장이 주는 행복 때문이었다. 존스홉킨스대학 연구 결과, 적당한 스트레스를 받은 임산부가 낳은 아기가 발육 상태도 좋고 인지검사 점수도 높았다는 걸 알 수 있다.

 

행복은 일로부터의 탈출이 아니라 몰입에서 나온다. 물론 일에도 행복에도 등급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가장 행복한 일은 남을 돕는 것이다. 우리의 힘과 재능을 남을 위해 사용한다면 더 오래 깊은 희열을 맛볼 수 있을 거다. 나는 경쟁만능주의는 철저하게 경계하는데, 문제는 삶이 얽혀있다는 것. 역사상 언제라도 ‘그만, 이정도 발전했으면 됐어’라고 할 수 있는 싯점은 없는 거다. 그렇다면 그 싯점은 누가 정한단 말인가를 곰곰이 기억해 본다. 그럼에도 또 아직 경쟁의 과실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것도 인정해야겠다.

 

세계에 대한 합리적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이 생성한 악에 의해 세계가 구성됐고 그 세계가 인간을 억압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참 불행하다. 인간이 자초한 악이 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그 것이 보이지 않는 권력의 부메랑으로 선회하여 자신을 지배하고 조종하는 것을 상상해보라. 아이러니다. 따라서 아무리 저항하고 반항해도 그 어떤 선택도 무의미하다. 하여, 현실적으로 문제는 많지만 따뜻한 위로의 차 한 잔이 아니라,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냉수 한 사발, 이 시대 꼭 필요함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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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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