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필서예가 림성만
문필서예가 림성만

작년 시장에서 구입해 분에 심어 얄밉도록 예쁘게 핀 매화를 보았던 기억이 있었는데, 맵찬 날씨 속에서도 또 다시 꽃망울을 드리운 걸 보면서 ‘입춘’ 이라는 절기와 함께 자연의 위대함에 감탄중이다. 창 밖에 심어논 검은 대나무숲이 불어오는 바람에 시끄럽게(?) 우짖는데, 옷을 두껍게 껴입고 완행버스에 의지한 채 나만의 바닷가, 그 바닷가로 몸 산책을 떠난다.

어느 촌로의 소유인지는 모르지만 작은 밭머리에서 겨우살이 봄 배추들과 시금치, 또 다른 푸성귀를 만난다. 배추와 시금치는 땅바닥에 낮은 포복이라도 하듯이 납작하게 붙이고 이 겨울을 보내면서 자라는데, 겨울 것들이 당도도 높고 비타민도 풍부하지만 그건 그것들만의 노고요 풍성이 아닐까. 캐다가 쌈이라도 싸 먹으면 고소하고 달콤하겠지만 엄연히 주인 있는 채소다.

버스에서 내려 바다에 다다르기 전 농로 옆 밭에서 일하는 삶들이 보이고, 트랙터가 예쁘게 만들어 놓은 두둑들이 줄을 이어 흘러간다. 마을 사람들이 두툼한 겨울옷을 입고 씨감자를 심는 모습이 평화롭기만 한데, 두 사람은 두둑을 다듬고 한 사람은 씨감자를 고랑에 놓는다. 세 사람은 두둑 위에 그 씨감자를 주워 한 개씩 묻는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한데, 그들은 흰색 비닐로 두둑을 길게 덮어 주고, 잡풀과 수분 발산 방지, 동사 예방을 위해서 서로 품앗이를 하고 있다. 사진기를 꺼내 셔터를 눌렀다. 삶의 진솔함에···.

의문이 생겼다. 따듯한 날 버리고 왜 하필 겨울 맵찬 바람 속에 씨감자를 심을까. 그러나 거기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가을 볕에 심어 놓으면 씨감자의 움이 나왔다가 한파에 얼어 죽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며,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순리대로 살아가는 한 모습에서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 땅의 농부나 어부들은 결코 자연의 섭리를 어기며 살려고 하지 않는다. 우주의 질서에 가장 잘 순응하고 사는 삶들이 바로 그들이기에, 나는 그들에게서 자연과학과 철학 신화학을 배우고 더불어 사는 묘를 공부한다. 그들은 씨감자를 심어 봄을 활짝 열고 있으며, 흰색 비닐에 덮인 감자 밭에서는 씨감자들의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고 활짝 핀 감자 꽃들이 노래하는 듯 싶다. 이 모두 ‘자연이 학교요, 촌부가 스승’ 이라는 것을 깨우쳐 준다.

나는 그들처럼 내 가슴 속의 작은 밭에 씨감자 한 톨을 심어 새로운 봄을 열고 농로를 따라 푸른빛의 바다로 나간다. 주위의 논밭에는 파란 보리가 매서운 한파를 이겨내고 있는 모습이 감인함을 느끼게 하고, 농수로의 갈대들은 봄에 나올 그들의 새순을 기다리며 꼿꼿이 선 채 새봄을 기다린다. 연약한 새순이 비뚤어지지 않게 자라도록 바람막이가 되어 주는 것일까.

밀물이 충만하게 들어오고, 썰물 진 바다의 갯벌에서는 넉넉한 마음의 포만감을 느낀다. 파도가 밀려와 모래밭에서 한껏 재주를 부리고, 한 무리의 철새들이 동편 바다갯등의 옅은 물에 발을 담그고 고기를 노리고 있다. 갈매기들도 먹이사냥의 기회를 노리고, 그 갯등에 찰싹거리는 물 너울에 불그스레한 햇발이 수런거린다. 나는 그 햇발과 그것을 있게 한 해를 향해 나아가는데, 아침 바닷가에 나와서 해를 가슴에 가득 안아 보는 것, 그러면서 호흡을 조절하는 것은 상쾌한 일이다. 언제부터인지 기억은 정확하지 않지만 나는 해를 신앙한다. 해를 가슴에 가득 담으면 건강해질 것 같고, 그것이 내 속에서 활기를 불러일으킬 것 같은 믿음이 있어서이다.

이른 아침마다 백화산 꼭짓점에서 해와 교통·교감하는 것은 나에겐 큰 행운이며 바다가 가까운 곳에서 산다는 것은, 더 큰 행운이다. 그것은 물론 나의 쓸쓸함과 슬픔의 일단을 보여 주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쓸쓸함과 슬픔이 나에게는 약이다. 그것이 솟았을 때 우주의 참모습,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삶인가가 더 잘 보이는 까닭인데, 나는 지금도 바다가 있는 곳으로 나를 유배시킨다.

이 땅에 겨울이 왔음을 알리는 반가운 손님들. 올해도 먹잇감 풍부한 갯벌과 호수 아래의 풀섶으로 어김없이 철새들이 찾아들고 있다. ‘어김없이 찾아 온다’ 는 것은 자연의 이치를 거스르지 않고 때를 맞춰 찾아온다는 뜻이리라. 시도 때도 없이 잇속만을 좇아 줄을 서는 정치꾼들의 행태를, 감히 이 정연한 철새들의 대이동에 비유할 일이 아니다.

지난 해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우리 나라엔 시베리아 등지에서 110여종의 겨울 철새들이 혹독한 겨울을 나기 위해 찾아왔다. 서남해안 갯벌이나 강 하구 일대를 비롯해 전국의 크고 작은 호수들이 이들의 보금자리이다. 낙동강 하구와 금강 하구, 태안 천수만(혹자는 서산 천수만이라고 하지만, 한 쪽은 서산이고 다른 한 쪽은 태안이기에 나는 태안 천수만이라고 말하지만, 서태(瑞泰)천수만이라고 하면 어떨까.)

태안 남면 당암리 주변은 다른 곳에 비해 비교적 가까이서 철새들을 관찰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개체수는 해마다 줄어드는 추세이니 안타깝기만 하다. 한때는 수 십만 마리까지 찾아 오기도 했으나 최근엔 줄고 있어 심각하기만 한데,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수질 악화 등으로 먹이가 줄어든 것도 한 원인으로 볼 수 있겠다. 먹잇감이 줄면 영양문제로 번식 능력이 떨어지는 것이 문제인데 이건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

지금 간월호와 부남호엔 청둥오리와 큰고니, 고니, 가창오리, 기러기 등이 떼를 이뤄 옮겨 다니며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다. 대개 한낮엔 먹이를 구하러 주변 논·갯벌 등으로 흩어졌다가 오후 4~5시 무렵 다시 무리지어 돌아와 밤을 지내는데, 나는 모래톱에 새겨 놓은 철새들의 상형문자 같은 발자국 옆에 내 발자국을 찍으며 집으로 돌아간다. 가면서 그 발자국들을 천천히 돌아보면서 오래지 않아서 밀려 올라온 파도가 씻어 가버릴 발자국들을 보면서 되뇌어 본다.

“삶의 스승은 자연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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