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했던 장마와 태풍이 어느정도 가라앉고 진정한 가을이다. 몸과 마음이 지친 모든 사람들에게도 이 가을을 추석과 함께 만끽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으로 글을 열어본다.

 

「유혹(誘惑)」 글을(그것이 시, 수필, 논고, 비평 등) 쓴다는 게 얼마나 무모한 노릇인지 익히 안다. 무용(無用)인 줄 알면서도 빠지면 헤어나기가 더 어려운 세계. 그렇게 글을 나라에 발을 들이면 ‘사는 게’ 영 시시하고 그럴수록 더 ‘時時’ 해질수도 있겠다. 예술인 중 연봉이 가장 낮아도 문학이라는 짝사랑으로 황홀하니. 앞서간 어느 작가의 말처럼 제풀에 ‘높고 외롭고 쓸쓸한’ 종족이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쓴다. 아니 그렇기에 또 쓴다. ‘쓸 수밖에 없으니까’! 아님을 잘 안다. 그래서 자식들에게도 조금은 미안하지만, 그래도 거지처럼 살고 있지는 않는다. 늘 마른 목을 스스로 축이며 가는 길. 독한 것 내뱉으며 눈을 한 번 치켜 뜨며 글을 찾아 오늘도 기꺼이 앓는다. 술 한 잔 되지 못한 몇 마디를 채워 넣으려고 늦은 밤 유성처럼 하릴없이 헤매지만, 그래도 미끄덩하며 뭔가 빠져 나가면 갖은 애들 태우다 더러 자신을 바치기도 하면서, 가난한 예술가여도 아직은 자존이 살아 있는 것인가.

소금쟁이 한 마리가 물 위를 여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을 보았다. 소금쟁이가 물 위로 자유롭게 거닐 수 있는 것은 몸이 가볍고 다리의 잔털이 기름기와 공기방울을 맺히게 하기 때문인데, 우리도 인생의 걸음걸음에서 특권을 내려놓고 작은 마음, 욕심을 줄이고 여유의 공기방울을 채우는 건 어떨까? 그러면 ‘유혹’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는 일이 없을 것인데, 지나온 청춘은 환상이던가. 그러나 아직 나아갈 길, 아니 해야할 작업(작품)이 남아 나는 부단하게 노력할거다. 어떤 ‘유혹’이 다 가와도···.

 

「종횡무진(縱橫無盡)」 행복한 사람은 일기를 쓰지 않듯이, 만약 나의 삶이 늘 평온하고 만족스럽기만 하다면 예술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은 내가 제한된 현실 속에서나마 자유와 기쁨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둠벙’ 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파놓은 웅덩이, 작은 못을 가리키는 말의 충청도 사투리다. 할아버지 세대는 모진 가난을 극복하려고 산비탈을 깎아 다랑논을 만들고, 모진 가뭄을 극복하려고 둠벙을 만들어 물을 저장해 두었다.

하늘의 빗물을 받아 모은 둠범의 물로 다랑논 농사를 지어 먹을 것도 해결하고 자식 공부도 시켰는데, 그런 둠벙에 할아버지는 고마움을 표시하고 고된 농삿일이 끝나면 발을 닦고 삽도 씻었다. ‘다랑논과 둠벙’ 은 할아버지 세대의 가난 극복의 상징이기에, 요즘 아이들도 그런 할아버지 세대에 대한 고마움(?)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의 풍요로움이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세상살이는 결코 쉬운게 아니다. 내가 생각하기엔 그렇다 지나고 보면 행복했던 순간도, 후회스러움과 아쉬운 것도 있었으리라 생각해 보지만, 그렇다해도 인생살이엔 순리가 있는 법인데, 굳이 사는게 무엇인가를 철학적 관점으로 다가가지 않아도 세상살이는 울퉁불퉁한 자갈길이다. 이 싯점에서 우리들은 ‘둠벙’을 잊어버리는 처절함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에 방점을 둬야 할 것이다.

 

「꽃(花)」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오월에 피는 ‘장미꽃’ 도 천 년 만에 피는 ‘우담바라’ 도 아니다. 흥건하게 땀흘려 일한 그대 얼굴에 피어난 하얀 ‘소금꽃’이다. 그렇다면 과연 꽃이 예쁠까. 솔직히 가끔은 고민해 보는데, 관성적으로만 보면 꽃은 엄밀히 말하면 생물이다. 우리가 그것을 꽃이라 칭하고 각기 다른 이름을 붙여 부르는데, 과연 꽃이 예쁠까. 우리 사는 곳을 조금만 비켜 바라보면 모든게 꽃이다. 일주일에 두 번 노인복지관에 공부하러 가는데, 아직은 젊은(?) 내게 배울것이 있는건지 열심히 공부하는 어른들의 열정에 감탄을 떠나 아름다운 꽃이라 생각하는데 동의하실지.

새로 구상한 작품에 필요한 물감과 붓을 구입하려 아침일찍 버스로 서울 인사동엘 갔었다. 수 많은 외국인 꽃(?)도 보이고, 젊은 꽃(?)도 보였지만, 내게 물감과 붓자루 꽃만 생각하고 있었기에 내려오는 버스에서 과연 꽃은 있고 예쁜가 생각해 보는, 고민 중이었다. 정말 꽃은 예쁜 것인지... 이 글 적으면서 새로 구입한 음반 rachael yamagata의 목소리와 맥주 몇 캔 마시는데, 맥주꽃이다. 꽃이 다른 곳 아닌 여기에...

 

「염(鹽)」 인간의 혀를 감동하게 하는 세상에 결코 없어서는 안될 꼭 필요한 고귀한 선물은 소금이다. 내겐 딸과 아들, 두 명의 자녀가 있다. 이젠 모두 내 품에서 떠나갔지만 그들을 키우면서 당부했던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소금이 되라’ 였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이 지금 소금 역할을 하고 있을까. 감동적 삶은 아니더라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건 이 세상 모든 부모의 바람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공감하시는지. 음식을 만들면서 최고의 비법은 정성도 있지만, ‘간’ 이라고 단정해보는데, 아무리 좋은 재료라 해도 ‘간’ 이 맞지 않으면 소용없는 이치인거다. 염부가 땡볕에서 만들어낸 소금을 우린 하찮게 보고 있지만, 그 소금은 다이아몬드와도 바꿀 수 없는 고귀한 선물인거다.

사회생활도 그렇다. 잘난이 못난이가 어우러져야 돌아가는 이치인 것처럼, 그러나 요즘 매스미디어에 등장하는 잘나가던 정치인의 추악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 정도면 나는 나름, 가난해도 잘사는거라고 자위해 본다. ‘왜 나만’ 이럴수도 있지만, 아직 복권 한 장 사보지 못한 바보스러움, 그게 잘못일까. 요행, 난 그런거 싫다. 땀흘려 노력한 빵의 댓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거 알기에 지금의 생활이 조금 궁핍하고 녹록하지만 그래도 내겐 견딜 수 있는 창작의 자유가 있어서 고마운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거다. 그게 행복아닐까, 어쩌면...

 

「가을 길목에서(秋路)」 로베르트 슈만이 클라라에게 선물한 ‘오보에와 피아노를 위한 세 개의 로망스’를 나는 누구에게 선물해야 할까. ‘여닫이도 따지 않’은 ‘흔흔한’ 봄도 가고 가을이 마구 내 가슴에 닥칠 때. 봄여름 다 지나와 돌아보면 ‘천 갈래’ 가슴 녹이는 꽃바람이 ‘죄’ 라던 그때의 무모함도 그리워진다. 그렇게 ‘꽃을 좇자 살’ 던 시절이 없었으면 그리움의 여울이며 물소리의 굽이굽이를 어이 알까 싶다. 아니 ‘가슴엔 볼심지를 두고 두눈엔 쌍심자를’ 돋우지 않았다면 청춘이라고 추억하기도 민망할지 모른다.

쇠도 녹일 뜨거움 속에서 ‘천지를 떠돌’ 만큼 호기로 넘치던 생의 한때. 먼 구름을 따라나서던 먼 길의 손짓들도 수그러들고 이제는 여울의 물소리마저 수척해지고 있다. 그래도 ‘은근한 울음’들 받아들고 미뤄둔 이 가을도 더 지울 수 있으리라. 이제 조금씩 버리며 여위어가는 먼 여울의 여운이 깊어만간다.

어김없이 가을에 취한 것이 아니고 가을을 앓는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아직도 감성적인지 솔직히 가을이면 가슴이 설렘을 감출 수 없다. 고즈넉한 들판, 적당한 온도, 편한 옷차림 정말 좋다는 느낌밖에, 산다는 것은 현실인데 기차로, 버스로, 도보로 이 시간을 만끽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기억하면 아프지 않은 삶이 있을까. 참살이를 위해 다가가는 건데 쉽지는 않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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