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들어 별을 보아라 그리고 꿈을 꾸어라

어떤 이는 비단결 같은 냇물에서 꿈을 키우고, 어떤 이는 알알이 박힌 별을 보고 삶을 바꾸었다고 한다. 또 어떤 이는 오랜 방랑의 길을 멈춰 섰고, 어떤 이는 칼 같은 산들이 얽히고설킨 모습에 비탄함을 노래했다.

별 하나 나 하나 헤는 마음이, 우리네의 꿈과 사랑, 소망이 별이 되지 않았을까. 소나무 위로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이 고스란히 내려앉은 곳.

이것은 완벽한 고요의 침묵이다. 인간이라곤 오직 나뿐, 소음이라곤 내 숨소리 뿐인데, 숲길은 적막할 뿐 아니라 서늘하고, 소나무가 뿜어내는 피톤치드와 작은 계곡이 뿜어내는 음이온이 섞인 공기는 정말 상쾌했다.

숲은 적막하고 서늘할 뿐 아니라 단정하고, 잡목이 우거진 일반 숲과 달리 소나무만으로 빽빽했다. 그것은 고스란히 문화재청과 충청남도가 문화재 복원용으로 소나무를 기르기 위해 관리하기 때문이다. 튼실한 소나무만 남겨두고 잡목을 모두 솎아낸 것 때문일까. 하나같이 잘생겼지만, 유난히 쭉 뻗고 굵은 안면도 홍송은 모두가 미인송이다.

소나무는 줄기 중간에는 가지가 거의 없고 꼭대기에만 풍성한 머리채처럼 푸른 솔잎이 우거져있다. 소나무는 스스로 가지를 부러뜨리기 때문인데, 가지가 많이 뻗어있으면 눈이 내렸을 때 가지와 함께 몸통이 꺾여 나무가 죽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서 스스로 가지를 깔끔하게 정리하는데, 안면도 소나무숲에서 인생이란 내려놓고 살아야 한다는 교훈도 얻는다. 서늘한 바닷바람이 적막한 숲을 관통할 때, 바다를 바라보며 땀을 식혀본다.

「내게 예술이란 고독과 고통이 잉태한 글이다.」

이제 내게도 육십갑자가 지나가고 고희를 향해 빠르게 달려간다. 하지만, 나를 취재한 여러 기자들이 요즈음 내 글은 노작가(?)가 쓸 수 있는 문장이나 형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놀랍도록 파괴적’ 이라는 좋은 표현도 있고 전통적인 형식을 넘어서려는 작가의 욕망을 말한다고 하기도 하는데, 과분한 말씀이다.

나는 이 모든(논고, 비평, 수필, 시, 편지, 칼럼) 것이 형식을 부수고 싶어하는 예술가의 열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솔직히 말하면 나는 나이에 합당한 세계관이나 양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분명한 것은 나는 늙어가고 있고 나이에 맞는 삶을 살고 있지만, 창조적인 예술가로서의 내 서예작업과 문학은 나이가 없다는 것이다.

작가는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갱신하지 않으면 상상력이 잠겨 버린다. 상상력이 끊겼다는 것은 작가에게는 죽었다는 사형 선고인데, 하여 나를 불편하게 하고, 변화하며, 갱신시키기위해 다양한 방법을 쓴다.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여행을 떠나거나, 아무도 없는 곳으로 이사를 가고, 술에 취해 정신을 잃기도 하는 등 이런 행동들이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실 예전보다 생활이 그리 나아지지는 않았지만 불안한 동력이 필요하다고 느끼기에 시골생활을 하는건데, 시골은 고독하고 불편하기 때문이요. 몸과 정신이 안락하면 글을 쓸 수가 없는 이치다. 현실을 직시하면 고향에서의 예술활동은 딜레마다. 그럼에도 유유자적 하면서 노년의 집필을 위한 격렬한 준비. 나의 창작열이 고향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하다.

작가로서 고향 생활에서 다짐한 신조는 ‘가난한 밥상’과 ‘쓸쓸한 배회’다. 도시 사람들은 너무 많이 먹고 탐욕이 가득한 아수라의 세계 속에서 오직 또 다른 탐욕만을 추구하는 건 아닐까? 우리의 조절할 수 없는 탐욕의 끝은 어디까지인가. 군사독재시절에 횡행하던 정치적 탐욕보다 오늘날 자본의 탐욕이 너무 무섭고, 우리 사회는 지금 돈벌이와 관련된 것이라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분위기인데 그것에 대해 부끄러운 줄도 모른다. 세상을 가장 잘사는 사람들,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고 실행하는 그들을 보면 비위가 상한다. 권력과 돈과 재산까지 탐하는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일까.

정치적 참사도 그렇다. 온갖 사람들이 이쪽 저쪽 기웃거리며 기회만 엿보는데, 정치꾼들은 한사람만을 지목해 토끼몰이 사냥하듯 끝을 보려고 하는데, 이건 우리 나라에 존재하는 총체적인 부실이 만든 결과다. 또 욕망과 소득은 나날이 커지지만, 그것을 따라 걷다 보니 이웃과 사람을 잃고 스스로를 돌아 볼 수 없게 되는거다. 그 상태로는 즉, 소비적 자본주의의 욕망을 이기지 않고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인간다운 삶은 무엇으로 더 풍성해질까. 어떤 관계속에서 살 것인가를 고민해봐야 한다.

「세월의 흔적을 어떻게 지울 수 있을까」

내겐 두 분의 고모님이 있다. 한 분은 10여 년 전 세상과 이별 하셨고 한 분만 계시는데, 고모님을 기억해보면 깐깐함과 정갈함 이었다. 언제나 곱고 단아하지만 ‘늙는다’는 단어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이랄까? 지난 6월 끝자락 97세 고모님의 건강이 좋지않아 어머니와 함께 찾았었는데, 정신은 맑아 보였다. 고모님께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지금 내 건강이) 내년에 또 따라줄지 물러’ 하시면서 내 손을 잡았는데, 76세의 누님(큰딸)도 감정이 이입된건지 초롱한 눈에서 맑은 수정체가 흐르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아쉬움과 그리움의 회한이 교차된걸까. 고모님은 내 아버지의 유일한 핏줄인데도 불구하고 자주 찾아뵙지 못하고 예술이니 뭐니 하니 정말 부끄럽기만 한데, 고모님은 이젠 귀도 어두어 하고 싶은 소통도 어렵고, 그래도 내 아버지 대신 더 건강하셨음 하는 생각이다. 가끔 젊음이 가버렸다고 느낄 때가 있는데, 그러나 훗날 되돌아보며 젊음이 떠난 건 훨씬 나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안타까워하게 된다. 나이 든다는 것과 늙는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고, 주름살은 미소가 머물다 간 자리일 뿐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독자와 소통하고 싶어서 글을 쓰는데, 사람이 그립기 때문에 쓰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글을 안 쓰면 세상과 사람으로부터 상처받은 사람이라고 느껴지는데, 누가 상처를 준 것도 아니지만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상처받은 상태가 되는 거다. 내겐 글을 쓰면 그 상처를 치유할 강력한 에너지가 생겨나는데, 이제는 감히 나이가 있기에 돈과 문학적 기득권 등은 얻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알 수 없는 간절한 욕망이 하나 자리잡고 있는데 그건 초월성과 영원성에 대한 욕망이다. 이룰 수 없기에 매 순간 상처받고 그것을 이기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을 반복하는 것, 이게 내 운명이 아닐까?

요즘 생각이 드는건 서예와 문학에도 색다른 형식으로 이겨내든, 파격적인 소재와 감동으로 이겨내든, 창작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느냐 하는 것을 고민하는 것이 작가로서 사는 방식이 아닐까? 때문에 나의 라이벌은 내가 아닐까. 그리므로 지금부터 라이벌을 이기기 위해 다시 행복한 고통 속으로 잠길 준비를 해야겠다. 100세를 바라보는 고모님을 생각하면 아직 새파란 어린애가 아니던가. 이게 바로 영원한 청년 작가가 살아가는 방법이라 말하면 웃으시려나.

고모님이 좋아하시는 초코파이가 생각나 드렸더니 웃는 모습이 6월의 햇살보다 더욱 밝아보인다. 난 또 고모님한테 한 수 배운거다. ‘욕심없이 미소를 잃지말라고’ 고모님은 부연하면 내 아버지의 누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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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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