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끝자락에서 시작된 코로나19 감염병 사태로 온 나라가 아직도 몸살을 앓고 있다. 지난주 오후 집근처 산책에 나선 주민들이 예방을 위해 마스크를 쓴 모습을 보면서 아직 감염병이 다 물러가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초록보다 먼저 달려온 예쁜 꽃망울이 초여름을 전하고 있는데, 희망의 빛이 아닐까, 나와 우리 사회의 감염병 퇴치를 위해 발 벗고 나선 정부와 함께 우리 국민들도 노력해야겠다. 나 혼자 사는 방법은 없을 테니까,

우린 지금 어디로 가는 것이 정답인지 알 수 없는 길에서 앞선 이가 내딛는 걸음이 뒤따르는 이들에게 길이 되는 시절을 살고 있다. 마치 사막의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미지의 앞날에 대한 두려움이 크지만 어느 길을 따라갈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린 일. 그 선택이 우리 모두의 소망을 향해 나아가는 데 최선이길 바랄뿐이다. 감염병의 공포가 이어져도 싯적 순간은 늘 있다. 지나치는 바람처럼, 고치지 않아도 되는 버릇처럼.

 

「치유」 먹이와 함께 들어온 이물질이 조개의 속살에 상처를 내면, 조개는 즉각 콘키올린을 내어 이물질을 감싼다. 콘키올린이란 조개가 먹이로 흡수한 것 가운데 미네랄 등의 칼슘 성분을 화학처리 해 만든 물질인데, 그것에 놀란 조개는 콘키올린을 내고 또 내어 수백 수천 번씩 이물질을 감싼다. 이렇게 해서 생성되는 것이 진주인데, 다른 광물성 보석과 달리 진주는 한 생명체가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에서 창조되는 것이다.

이런 진주의 생성 과정은 종종 예술 창조 행위를 상징한다. 예술이란 집단 혹은 개인의 상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탄생하는 것이니 여기에 비유해도 적절하다고 하겠다. 그것은 글로 옮겨지면 서사가 되고, 운율에 얹혀지면 음악이 되며, 색채와 형태로 전환되면 회화가 된다. 화려하게만 보이는 인상파 회화의 바탕엔 존재의 순간성이란 한계가 깔려 있고, 세잔이 엄격한 기하학적 도형에 기댄 것은 모든 이런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내게 글을 쓰는 것은 상처에서 돋아나는 새살과도 같았다. 그런 상처와 새살이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 오랜 시간을 방황하고 열고(熱考)하기만 해서인지 끝내는 정작 내가 가야하는 길에 대하여 회의를 느낄때도 있었다. 내가 어느 목적을 위해서 가는 길인지. 아니면 내가 살아가야 할 끼니벌이를 위하여 가는 길인지. 그렇다해도 내가 가는 길에 아직도 왜 그리 많은 걸림돌이 있는지.

하지만 이러한 끝없는 화두를 거두고 즐기면서(?) 아무런 고심, 고민과 나를 비롯한 주변의 생각을 접기로 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나 혼자만이 결정해야 하고 스스로 노력해야 하기에...

 

「인연」 새벽안개 자욱한 암자에서 청아한 목탁소리가 들려온다. 잠들어 있는 미물을 깨우는건가. 절집의 하루가 시작되는건데, 평소 존경하는 여승중에 내가 보기엔 음식을 잘만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목탁 두드리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아니, 인자한 미소가 있음에도 한 편으론 다른 기억이 있는걸까. 스님은 속세에 두고온 예쁜 딸이 있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사연이야 어찌 깊이 알겠냐만은 딸을 그리워 하는 것은 승려이기전에 엄마의 마음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스님의 눈물을 본적이 있다. 어쩌다 딸과 전화 통화후엔 눈물이 그렁하는데, 그 심정 조금은 알 것 같다고 말하면 건방진걸까. 속세에 두고온 딸이 왜 생각나지 않을까만은, 모정의 그림움은 있을거다. 외로움과 그림움이 밀려오면 목탁소리가 더 커질까?

작은 텃밭에서 여러 가지 채소를 거둬들여 음식을 준비하느라 바쁘기만 한데, ‘스님 사람도 없는데 왜 이렇게 서둘러 음식을 준비하세요’ 스님은 말없이 그저 음식 장만에 열중이다. 얼마후 전화벨 소리에 스님의 밝은 모습이 보인다. ‘아가 어디쯤 왔어’ 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얼마 지나 나타난 딸을 보고 합장한 채 나무아비타불이다.

산속 암자에서 수도생활을 하고 있지만, 속세의 인연은 왜 그리 질기기만 한건지. 그것이 끊을 수 없는 인연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떠나가는 딸을 바라보며 또 얼마나 가슴이 아릴지 스님이 왜 속세를 떠났는지 궁금했지만 내가 무슨 자격으로 물어볼 수 있을까. 스님의 목탁소리는 오늘도 맑게만 들려온다.

 

「무채색의 낭만」 푸르름이 나무에 내려앉고 제빛을 잃은 마른잎들은 바람에 나부끼다 한 줌 거름으로 돌아가는데, 어느새 날씨는 초여름으로 달려간다. 코로나19 시국으로 지나온 봄을 돌아보며 나름 집에서 공부한 것을 정리 준비하는 시간. 빛나는 것과 빛나지 않은 것 모두에게 평범히 다가올 무채색의 낭만을 기억해본다.

나에게도 낭만이 있었다.(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것이 아름답거나 불편했던 기억이 있었더라도 책상위에서 원고지에 적어둘 수 있는 그런 추억이 왜 없을까만은, 가슴 설레던 그 때가 50년이 다되고나니 아쉬움이 없었다면 그 또한 아쉬움이 아니던가.

“나는 만나지 못한 너의 열 여덟 살을 사랑했다. 그리고 앞으로 난 너의 수많은 날을 사랑할 것이다” 그 때는 그 말이 멋있는 줄 알았다. 그렇게 말했지만 그것을 지켰던가. 기억하면 통한의 아픔이었다.그녀를 만나고 “널 처음 본 순간부터 나는 너를 마음에 담았다” 어디서 그런 말을 할 수 있었는지 용기였을까

헤어지면서 했던 말 “ 내가 끝을 내기 전까지 너는 내 여인이고 나는 너의 남자친구다” 지금 생각하면 조금 오글거리는 말이었지만, 그 땐 그랬다. 나의 연애사에 왜 애닳픔이 없었을까. 하지만 추억은 가슴에 남는 것, 그것을 좇아서 가는 것이 아니기에 이 초여름에 기억해 보는 것이다.

 

「삶과 사랑」 우리가 눈을 떠서 만나는 아침은 늘 지구상에 처음인 시간이다. 아무리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미래를 예상한들 다음에 벌어질 일을 어찌 알겠는가? 그래서 삶의 시간이 안개가 걷히고 나서야 알게 되는 오리무중 속 풍경이며, 오늘도 안개속에서 미래를 향해 가는 시간 여행자가 아닐까.

사랑은 논리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우린 왜 그것을 간과하고 지나치는가. 죽을만큼 뜨거운 그대가 그리워 찾아왔지만 너무 뜨거워 미적지근한 곳으로 몸을 맡겨도 다 부질없는 것. 냉탕과 온탕을 옮겨가는 것이 인생이거늘, 그것은 찜질방의 원리와도 같은 것인데, 나비도 꽃을 떠나기 전 까지는 꽃이었듯, 나무는 보면서도 숲을 관망하지 못하는 것이 아쉬움이다.

그리움, 어쩌면 숙명이다. 그것이 없디면 사랑도 없었고, 그리움엔 처절함이 동반하는데, 이루지 못한 사랑도, 가슴속 깊이 간직한 몰래한 사랑도,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주를 유영하는 저 별들도 다 사연 있거늘, 우린 그 순수함에 허우적거리지 말고 진정한 삶이면 얼마나 좋을까.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거대한 바위를 뚫는 것처럼, 한생각만 하면서 살아가면 언젠가는 위대함으로, 그러나 그 사랑이 어쩌면 치명적이어서 결코 쉬운 것은 아니어라.

사랑, 결코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지만, 결정적인 것은 고귀하다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조그만 견해이다. 삶과 사랑, 그럼에도 어떻게 풀어야 하는건지는 밑에 깔려있는 숙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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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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