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옛부터 본 적 있는 그가

하늘빛으로 내려와 나를 점령한다.

 

긴 잠에서 꿈꾸듯 곰팡이 서린 벽죽에선

수만마리의 거미가 돌아다니고

창가에선 마른 종잇장들이 찢어져

새하얀 분으로 흩어져 긴 그림자로 남아

몸이 기억하는 그의 살냄새는

이름 없이 시선 끌어당겨

어린 꽃잎을 닮는다

 

돌아서 보면 가끔 낮달이 슬퍼

그림자처럼 온전하지 못한 나여

 

자전거 바큇살 돌아가듯

허공에서 별들은 탄주하고

보일 듯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내 몸사위를 켜켜이 껴입은 그가

밤이 천천히 가라 앉는 속도에 맞춰

거대한 산처럼 자라나

무수한 풍경을 서럽게 지운다

 

천체를 머리맡에 옮겨다놓는

풍성한 은닉속에 한 점 자애도 없고

온통 가시뿐인 모자이크의 침실속엔

안경 너머 위험한 익사체처럼

속절없는 일침 뿐이다

 

어쩌다 아니, 이런 시(詩)가 나오면 저는 주체할 수 없는 형용으로 환희를 느낍니다. 아직까지는 감성적으로 살아가려고 발버둥치는건지도 모르지만 그게 제가 해야할 공부이니 어찌 하겠습니까.

들 뜬 마음에 냉장고에 넣어놓았던 맥주 몇 캔 살며시 가져와 마시는 중인데, 하긴 이런 때 안마시면 언제 마시겠습니까. 조금 느긋함을 즐기면서 LP음반 올려놓고 감상하는 시간이니 마음 편한데, 그럼에도 한 쪽 마음이 허전한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자업자득 이지만, 산다는 것은 고통의 연속인데 그것조차 제가 견뎌내야 하는 몫인걸 알고 있습니다. 사랑에 울고 웃었던 때가 있었죠. 허황된 것은 아니었기에 기억하면 그래도 아름다운 추억입니다. 돌아오지 않을 청춘이지만, 머릿카락 휘날리며 앞으로 아름다운 사랑을 꿈꾼다면 욕심일까요. 이제 멋있게(?) 늙어가고 싶은데 공감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감히 말하면 작년과 올해는 다르다는 걸 느끼기에, 작년 여름과 가을 두 차례감기로 죽다 살다 했습니다. 살면서 믿음의 끝은 어디이고, 과연 믿음은 정말 있는 걸까요. 저도 노래를 하고 싶은데, 세상살이가 힘들다고 말들 하지만, 그래도 견뎌야 하는 것은 사람들과 어울려 아름다운 노래를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길은 가야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끊임없이 길을 닦는거죠. 길의 역사는 인간의 문명사와 궤를 같이 합니다. 그 만큼 길은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해주는데, 문득 어린 시절에 내달리던 골목이 생각납니다. 미로같이 고불고불 꺾어진 좁은 골목길은 아늑하면서도 재미난 곳이었습니다. 큰 길은 넓고 시원스러우나 차가 다니므로 골목길은 아이들의 놀이터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큰 길은 막히는 길입니다. 지금도 차 때문에 그 이름값을 못할 때가 많습니다.

 

초록 물감 흩뿌린 듯

짙은 녹음 사이를 파고드는

봄 햇살이 눈을 호강시킨다.

 

계절이 바뀌어도 항상 그 빛 그대로인 대나무처럼 그렇게 살고 싶지만, 나이를 올리는 싯점에서 보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진척은 이어져야 하는데, 건강한 삶의 향유는 무엇인가 우리가 기억하고, 나이가야 하는 목적은 분명 있을 것이지만 그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를 생각해봐야 합니다. 왜냐면, 욕심이 앞서지는 않았던가를 곰씹어봐야 하기에 하는 말입니다.

도대체 욕심이란 어디까지 일까요. 끝없는 욕망이 잠재돼 있다고 말해도 한계는 분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요.

봄날은 가는데, 아니 봄빛이 스러지는데, 또 언제나 그랬듯 올봄도 그냥 갑니다. 때 이른 더위 속이건만 아직 봄으로 부르고 싶은 오월도 마지막 굽이로, 가는 봄을 늘 아쉬워하는 것은 짧기 때문일까요. 인생의 ‘화양연화’ 같은 꽃철이라 더 그럴까요. 노래 ‘봄날은 간다’가 예술인들 사이에 거듭 불려나오는 것도 ‘연분홍 치마’ 봄날의 짧은 휘날림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 가녀린(?) 생각도 이제 모두 ‘봄바람’ 에 실어 보내야 할 때, 그런데 왜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될까요. ‘가거라’ ‘돌아보지 마라’ 강한 어조로 내뱉어 보지만, 이게 부탁인지 협박인지 짐짓 무장한 듯한 표현에 속내도 보이지만 가라고 하지만 실은 가라는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반어(反語)인들 갈 봄이 아니가리오. 그러니 가되, 내년에는 눈부신 꽃봄으로 오시라. 그렇지 않으면 가지 말던지.

영국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 에 나오는 ‘샹그릴라’ 는 가상의 이상향인데, 넉넉하고 평안한 유토피아로 그려집니다. 하지만 ‘히말라야 8540m 설산(雪山)에 핀으로 꽂은 꽃잎처럼 우아한 사원’ 이란 구체적 묘사 때문에 “실제 샹그릴라는 여기”라는 주장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중국 원난성 한 지역을 딱 찍어 정식 지명까지 샹그릴라로 고쳤는데, 히말라야 부근 호텔·식당·가게에 붙은 흔한 이름도 샹그릴라이지만, 따지고 보면 모두 자칭(自稱)입니다.

화려한 꽃이 만발하는 지금, 서로 오월의 꽃은 ‘바로 나야’ 라고 뽐내는 듯합니다. 오월은 우리 꽃 모란과 작약이 사랑스러울 때인데, 여기에 언제부턴가 장미가 함께 했지만, 모란과 작약 그 둘을 구별 못하면 어떤가요. 그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으면 될 일입니다. 현실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어찌보면 논공 행상으로 비춰질 수 있는, 비유하자면 작약과 모란, 장미꽃 같은 화사한 아름다움을 시샘하지는 말아야겠지요. 그 아름다움을 머금게 해주는 것이 우리가 바라는 마음이 아니던가요.

어느새 늙은 봄이 떠나려 채비를 갖추고 있는데, 바쁜 척 하다 오월에 핀 꽃들에 눈길 한 번 제대로 못주고 세월 보내고 있지만, 마음속의 샹그릴라를 기억하면서 오월을 보내는 것은 어떨까요. 정의(正義)는 때로 독선(獨善)과 이웃사촌입니다.

저도 이제 절박한 오류만 남기고 잔인했던 코로나19 바이러스와 봄을 보냅니다. 림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 내용중에 단가 ‘사철가’를 부르는 김명곤의 목이 봄 대목부터 청승맞게 꺽입니다.

‘봄아 왔다가 가려거든 가거라.’

골목길에 칠십을 바라보는 한 아이가 서 있습니다. 정말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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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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