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고통 중에는 실재하는 고통도 있지만 생각이 빚어낸 고통도 많다. 대다수 사람은 자신의 생각이 창조한 고통에 갇혀 살아가고 있는데 미래에 대한 걱정, 나보다 잘난 사람에 대한 질투 등은 모두 생각이 창조한 고통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실재하는 고통이 아니며, 그것들은 거짓 고통일 뿐이다. 거짓 고통은 과거나 미래에 근거해 있으므로, 나는 그에게 실재하는 고통과 거짓 고통에 대해서 말해주고 거짓 고통은 버리라 말하련다.

 

달빛은 그냥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아야 감동으로 다가온다. 걱정을 잔뜩 안고 바라보면 달빛조차도 무거울 뿐인데 달빛에 어디 무게가 있겠는가. 우리들의 걱정이 무게 없는 달빛에 무게를 더 얹을 뿐이다.

지금 여기까지를 온 마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달빛은 피안으로 다가오는데, 달빛 조차도 피안인 삶을 만나고 싶은가 그러면 ‘지금 여기’를 살 일이다.

돌이켜보면 글자를 익히기 전부터 문자는 무엇보다도 매혹적인 이미지였다.

직관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기하학적 형상들과 비교해 볼 때, 상징체계로서 학습된 의미를 즉각적으로 유출해낼 수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도상으로도 모든 문자들을 개별로 오롯하고, 모여서 흐름을 이룰 때도 참 아름답다. 개개의 글자가 구와 문장을 이루면서 나란히 나열되어 있거나 흩어진 글자들은 자의적으로 결합된 의미와 더불어 시각적인 질서와 변화를 표상한다.

또한 비자발적인 메시지들이 도처에 널려 있는 무한 정보의 시대에서 문자는 모든 이들이 가장 흔히 접하고 창출해내는 이미지기도 하다. 모니터 안과 종이 위 건물 안과 길 위에서 문자는 의미와 형상으로 말을 건다. 그렇지만 문자가 본분을 넘어서 형태적 특질을 과하게 주장하면 폭력적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어떤 경우는 시대가 변해감에도 문자의 표현양식 자체는 과거의 형태에 그대로 머물러 있어서 오히려 생경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니 타이포그래프 예술이 미술산업의 핵심으로 각광받는 것도 당연한 변화이리라.

 

이렇게 문자미술의 맥락에서 최근 몇 년 동안 급속히 추진되고 있는 간판정리사업을 보면서 반갑기도 하면서 조금은 못마땅하기도 하다. 무질서한 도시윤곽을 정리하여 새로운 미적 가치를 부여하고자 하는 노력은 당연히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간판의 외적 크기에만 집중해서 문자가 가리키는 지시체와 표현되는 도상 사이의 조화는 무시되거나 획일화한 형태로만 제시되는 경우를 왕왕 마주치기 때문이다. 개개 상호가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야 할 개성이 외적 통일성 안에 갇혀버린 몇몇 지역의 간판들을 보면 현대식 공장에서 잘 찍어낸 기성품처럼 모든 문자가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고장 태안에서 꾸준하게 글꼴을 다듬어 되살리는 작업을 하는 장인 한 사람을 보면서 ‘바로 이거야’ 란 생각을 가져본다. 따라서 여기에서 결코 상업미술을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상업미술이 판치는 물결 속에서 그는 부단한 노력으로 전국 광고 공모전에서 손글씨를 모티브로한 작품으로 2년 연속 대통령(대상)상과 국무총리상을 수상한다.

 

컴퓨터 모니터만 켜면 문자가 춤추는 다문화시대에 손글씨로 자신만의 독특한 작품을 만들어 시대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든지 가능성을 보여주는 모습과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무한한 모습에 글꼴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박수를 보낸다.

그러나 여러 의미에서 문자노동자인 나는 각개의 문자와 그 결합이 의미와 형상 안에서 서로 균형을 이룰 때에야 행복하다. 그것은 시점에 이르러 문자 자체와, 그 문자 너머의 세계와 가장 잘 소통할 수 있기 때문인데, 또한 이렇게 균형 있는 문자들을 만났을 때 그 의미에 가 닿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니 우리는 문자를 아름답게 만들어야 하고, 그 글꼴의 아름다움을 깊이 감상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음향적 언어보다도 문자로 소통하길 좋아하는 엄지족 시대의 인류에게는 메시지가 오가는 통로 안에서 온갖 예술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이 지면처럼.

 

20년 동안 서예학원을 운영할 때의 일인데, 어머니와 딸이 찾아왔었다. 딸에게 서예를 지도해달라는 취지였는데, 딸은 볼멘 소리로 어머니한테 “왜 시대에 뒤떨어진 서예 공부를 하라고 하느냐.” 그래서 나는 이런 말을 해줬다.

“서예를 전공으로 한다거나 서예학원을 차린다면 나처럼 성공하지는 못 할거다. 하지만 취미로 다가 간다면 가장 앞선 현대인이 될 거다. 요즘 웰빙(참살이) 웰빙 하는데 서예가 진짜 웰빙이다. 정신이 맑아지고 몸도 좋아지고 우리가 2천 년 전부터 즐겨온 최고급 수양이다. 잘쓰고 못쓰고는 증요하지 않다. 하느냐 안하느냐가 중요한 차이다. 또래를 봐라 영어, 인터넷, 디엠비 휴대전화, 서로 뭐가 다르냐. 서예 공부를 한가지 더 한다면 가장 튀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 친구 빼놓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더니 지금은 결혼해서 잘살고 있다.

 

50년 가깝게 지방에서 서예세계를 지켜(?)오면서 서예가 교과과정에서 제외되고, 사람들은 점점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외면하는 등 바닥으로 추락하는 경험을 했다. 그러나 요즘 서예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차츰 늘어나고 있는데, 서예를 단순히 전통유지 측면에서 봐서는 안된다. 서예야 말로 우리가 잊어버렸던 진짜 참살이이고 참선이다. 지금보다 형편들이 더 나아지면 서예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

내 공간에는 17년 전에 썼던 탕흉(蕩胸 : 가슴을 씻다) 한 점이 걸려 있다. 가슴 ‘흉’ 자의 달월 획이 깍아지른 절벽 같아 아끼는 작품인데, 백화산 앞에서 살기에 매일 그 정기를 얻어(?) 이곳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작품이다. 서예를 위한 맞춤집도 구상하고 오랜 계획에 따라 준비한 것인데, 산천 정기로만 되는 게 아닌 것 같다. 학문을 갈고 닦아 마음을 다스려야 하는데 정말 쉽지 않다.

 

마라톤에서 마지막 스퍼트가 중요하다. 나는 앞으로 3년 이후를 정했다. 발표 준비도 거의 끝나가고, 펴낼 책 원고도 마무리 단계다. 내 글씨를 보고 강하다고 하는데, 부드러워 지려고 노력중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여태것 골인점을 향해 달리느라 그런 건데 부드러운 초서(草書)는 남기려한다. 골인지점에 이르면 붓을 들고 노는 경지가 되지 않을까. 그때까진 아직은 요원하다.

 

 

 

/문필서예가 림성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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