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의 원병이 왔다. 의리가 아니었다. 풍신수길의 대륙침략, 왜의 야망을 이미 안 그들은 적을 자국의 영내에서 보다 외지인 조선에서 맞아 꺽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 1차 선발이 1천명, 사와 재가 거느렸다. 뒤이은 원병이 5천 조승훈이 거느렸다. 그러나 실패, 제 1회 구원은 먼저 패했다. 수장 소서를 공격했다가 평양에서 패전, 재와 사는 전사하고 조승훈은 퇴각했다.

명나라는 다시 동정제독 이여송과 병 4만3천으로 떠나게 했다. 이 와중에 왜장 가등이 이 영흥을 거쳐 북상했다. 북병사 한극성이 영흥에서 패전, 부사 국경인은 이때 임해 순화왕자 종신 김귀영, 황정 등을 묶어다 바치고 왜장 가등에게 투항했다. 그러나 민족의 의기는 아주 죽어있지 않았다. 드디어 의병들이 궐기하고 권율 장군이 승전 했으며, 훈련병 1천으로 진산 이치에서 왜군을 격퇴, 다시 병 2만과 괴장 처영의 병 1천을 거느리고 북상한 권율 장군은 수원 독산성에 진을 치고 서울 수복을 준비했다.

민중들은 용감했으며, 전라도에서 경상도, 충청도에서 일어났다. 곽재우와 조헌이 일어났으며 의령, 합천, 함양, 김천에서도 일어나 저항과 전투로 왜의 후방을 교란했다. 관군들도 용감했고, 밀양부사 박진, 진주목사 김시민의 결사대 결사항전, 경주의 적을 무찌르고 진주에서도 이겼다. 최후의 한사람 마지막 피를 바쳐 나라 위해 나라 지켜 목숨을 던진 금산혈전 장했던 칠백의사여... 조헌 부자 승, 령규, 그 밖에 민병, 피에 젖어 꽃 떨어진 금산의사여. 왕은 달아나고 조정은 무너지고 다스리는 자 의지할 자, 아, 이 강산 우리나라. 우리 땅 아니랴. 이 백성은 우리 겨레. 우리나라가 아니랴. 불길처럼 들고 일어나 아, 백성들은 용감했고, 의병들은 장했다.

경기에서 우성전, 전라에서 고경명, 광주에서 침일, 담양에서 김덕령, 금강산에서 유정, 강원에서 원호가 일어났다. 정안에서 이정주, 평양에서 양덕록이 묘향산에서 서산대사, 이붕수, 정문부가 경성에서 일어났다. 종성, 경원, 홍원, 함흥에서 일어났으며 영흥에서도 일어났다. 이들은 적장 소조천을 김천, 금산에서 적장 우시를 진주에서 흑전을 정안에서, 과도를 홍원과 영흥에서 쳤다. 거의 전사 어디에서나 궐기한 쓰러지면 일어서며 싸워 온 민병과 무명의사 의병들은 용감했었다.

2. 이순신(李舜臣), 임진왜란과 이순신, 아니 그냥 국민의 영웅 이순신, 마음에서 마음 시대에서 시대로, 불러서 그 때마다 가슴 설레는 얼마나 그 존재 훌륭했던 이순신인가, 육지에서의 싸움이 크게 패하여 쑥밭이 된 전국 나라 이미 기울어진 슬픈 운명을 누가 있어 지혜와 충성과 용맹과 성과 바름, 목숨을 바쳐 급한 형세 돌이켰던가? 결정적으로 누가 이 나라를 구해냈던가? 물에서 무찔러 적을 쳐서 승전했던가?

개전초 우리의 수군 경상좌수사에 박홍, 우수사에 원균, 전라우수사에 이억기, 이순신 장군은 좌수사였다. 제 1차 출동은 옥포해전, 이때 이미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수군 구궤, 협판, 등당에게 패전, 우리 전선 70여척을 거의 다 잃었고, 5월 4일 이순신이 거느린 함대는 겨우 90여 척, 대함대 적에 비해 너무나 약세 처음으로 여수를 떠나 적과 싸웠다. 낙안군수 신호, 흥양현감 배흥립, 충양현감 어영득, 보성군수 김득광, 녹도만호 정운, 방답첨사 이순신(純), 사도첨사 김완, 길도권관 김인영, 군관 이언량, 송희립 등 제장과 함께 거제도 동쪽 옥포, 웅천, 합포, 고성, 적진포에서 각각 제 2차 대전은 승리였다. 왜군의 대선이 25척, 중선이 10척, 그밖의 배로 7척을 뒤집어 엎고 무찔렀고 불질러 버렸다.

거북선이 출동한 것은 제 2차 해전 사천, 당포, 당항포, 율포에서였다. 5월 29일에서 6월 10일 바다 샅샅이 적의 함대를 추격하고 닥치는 대로 쳐 무찌르고 사로잡고 불지르고 뒤엎고 번개같이 우뢰같이 신같이 쳐부신 적함선이 대중소함 70여척 무찌른 적병수가 88이었다. 적의 주력은, 궤멸 제해권이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되었다. 제 3차 해전은 치열했다. 이 때 왜수군은 연전연패를 설욕하고 단번에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려고 필사적이었다. 저들의 제 1진 협판의 전선이 70여척 구궤가 거느린 제 3진이 대기웅세였다. 무찌른 적병수가 88척이었으나, 적의 주력은 궤멸, 제해권이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되었다.

제 3차 해전은 치열했는데, 이 때 왜수군은 연전연패를 설욕하고 단번에 불리한 전세를 만회하려고 필사적이었다. 저들의 제 1진 협판의 전선이 70여 척 구제가 거느린 제 3진이 대기웅세였다. 무찌른 적병수가 88척이었으며, 적의 주력은 궤멸, 제해권이 비로소 우리의 것이 되었다.

7월 6일 드디어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하여 전선 총 90여척 이순신은 한산도 안골포 해전에 출동했다. 앞으로 찌르고 뒤로 쫓고 꾀어내어 불지르고 총탄으로 쳐부수고 뒤집어엎고 목을 베어 바다속에 처박았다. 신출귀몰 빠르면서 정확, 적함대는 대낭패 적장 협판은 몸으로 겨우 달아나고 격파적함 약 100척 목을 베기 250, 이리하여 한산도·양해 전에서는 협판이 안골해전에서는 구궤가 대패했다.

제 4차 출동은 부산포 해전, 이제는 두려워 적은 정면의 대전을 꺼려했다. 달아나는 적선, 해운대와 다대포, 서평포 앞바다의 적의 대선 24척을 모조리 잡아 쳐부수고 그리고 또 불살라 버렸다. 이로써 적의 전라군은 거의가 궤멸, 남해안 제해권은 비로소 우리의 수중에 들어오는데, 다시 이때에 육지에서의 전투, 선조 26년 정월, 우리는 명나라 이여송 군과 연합으로 평양의 소서를 포위 후퇴시켰고 벽제관 전투에서 이여송이 대패 겁을 먹고 피하여 평양으로 다시 회군했고 같은해 2월에 함경도의 가등이 서울로 퇴각, 권율 장군의 행주대첩이 3만 왜군을 섬멸했다. 이리하여 왜군은 명군의 진주 수군의 대패 보급의 결핍 악역의 유행으로 평양 함경도로부터 모두 퇴각 명을 상대로 하는 담판에 응해왔다.

그러나 왜괴 풍신수길은 간악했다. 다시 또 왜군 5만을 김해 창령으로부터 투입 진주성을 재공략케 했는데, 싸움은 치열하고 진주성은 온통 의병들이 영웅적이었다. 진주목사는 달아나고 명군은 방관만 하는 중에 싸워서 지키면서 마지막 한 사람까지 결사항전, 의병장들이 차례로 쓰러지고 적군은 더욱 쳐들어 왔다. 창의사 김천일은 그의 아들 상건, 의병장 고종후, 양산도, 경상우병사 최경희와 함께 싸우다가 분한을 품고 남강에 투신한 의기 논개의 죽음도 이때의 일이었다. 26년 1월, 선조가 환도하고 이여송의 군대가 철수하고 27년 3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제 2차 당항포전에서 왜수군 함대를 또 대파했다.

30년 1월, 왜군이 다시 재침략했고 사흘동안, 무고 당하여 옥에 갇혀서 이순신이 파직됐다. 왜 수군이 증파되고 명나라 군대도 다시 건너왔는데, 원균이 이끄는 함대가 칠전진 해전에서 전멸, 난공불락의 한산도 본영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고 원균도 전사. 이때 육지에서는 남원이 함락되고 왜군이 다시 북상했다. 대패한 뒤의 우리 함선은 전부를 합쳐서 단 12척 뿐, 백의종군의 이순신에게 다시 삼도수군통제사의 특명이 내렸다. 아! 명랑 대 해전, 이순신은 우선 적 함대 55척을 어란포에서 도주시키고 9월 16일 전체함선 12척을 선두에서 지휘, 필사즉생(必死卽生) 필생즉사(筆生卽死) 일부당경(一夫當逕) 족구천부(足懼千夫) 엄한 군령에 사기를 돋궈 적의 대 함대 133 척과 일대결전에 들어갔다.

맞부딪치고 뒤집어엎고 찌르고 치는 백병전, 31 척을 무찌르고 적 함대가 패주했다. 임진왜란의 대세는 이로써 결정, 잃었던 제해권을 다시 찾고 왜군의 서쪽 진출과 전의를 꺽었다. 울산에서 또 패전하고 명나라의 수군이 도우러 왔는데, 8월 18일 왜괴 수길이 병으로 거꾸러지자 왜군은 차차 회군을 개시했다. 노량대해전, 이 때 적은 그 퇴로를 해상에 얻고자 5백수십척, 도진이 거느린 대함대로 최후의 발악을 시도해왔다. -이 원수를 멸한다면 죽어도 한이 있겠나이까- 이순신은 자신이 북채를 잡고 적의 진중으로 돌격했다. 명장도 전사하고 드디어 이순신도 이때 유탄에 쓰려졌다. -전투가 바야흐로 급하니 발곡하지 말라-

아들 이수가 대신 지휘하며 적함 2백여 척을 무찔러 처박았다. 도진은 겨우 달아나고 소서는 몰래 숨어 버렸다. 아! 대전란 7년. 잔악한 왜에게 침공 받아 피 튀고 살 쳐서 분노와 굴욕과 약탈과 유린 속에 나라와 겨레는 쑥밭, 숙명의 적에게 시달리던 임진년 왜란은 일단 끝이 났다.

3. 그렇다. 또 다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저 수·당의 침공을 또 말하랴. 병자년 호란을 또 말하랴. 한 번은 용감히 물리쳤고, 한 번은 영원한 굴욕을 당하지 않았던가. 짓밟혀 또 짓밟혀 붉은 피 흘리고 나라의 백성들 난도질당한... 북의 오랑캐 수·당의 침공 왜의 임란이 무엇 얼마나 다르고 그 성격이 다르랴. 북쪽의 열강 남쪽의 일본, 예나 이제나 호시탐탐 노리는 것은 한반도의 보석창고, 당쟁 내분 악정 분열 있을적마다 제 정신 잃고 민족의 역량 약화할 때마다 그 독아 언제나 번득여 우리의 허점을 찔렀거니 내치외교 국방 사상 허점 있으면 그들의 마수는 언제나 뻗쳐 우리에게 와서 덮쳤다.

그랬다. 저 우리의 왕조 왕정 사는 곧 당쟁 세도 사, 당쟁은 곧 내란을 또 외환으로 불러왔다. 당쟁은 곧 망국의 아픔을 초래했으며, 사대굴종 밖으로는 비굴하고 안으로는 서로가 강폭했다. 가렴주구 착취계색 백성들의 고혈 위에 궁궐을 쌓아 그 궁궐 구석구석 피비린내 나는 찬탈과 옹립과 시해의 궁중 참극, 사화 무고 음모 사사 추악하고 잔악한 집권 쟁탈사였다.

동·서·남·북인 대·소·내·중·골·청소북·탁소북, 노서 소서 원당 낙당 산당 한당 탁남 청남, 소론 노론 벽파 시파 갈리고 합치고 물고 뜯고 죽이고 가두고 귀양 보내고 독살하고, 그것은 곧 피의 기록 백성에 대한 학정. 드디어는 저 남북외적 왜와 호를 불러 들여 조국도 민족도 백성도 재화도 부녀도 노유도 청년도 처녀도 유린에 맡겨 끌리어 짓밟히고 총칼에 찔려 강폭한 그 적의 말발굽 더러운 야욕에 난도질당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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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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